엔비디아가 본격 출하한 차세대 인공지능(AI) 플랫폼 '베라 루빈'의 원가 중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62%라는 추산이 나왔다. 베라 중앙처리장치(CPU) 1개와 루빈 그래픽처리장치(GPU) 2개를 묶은 핵심 컴퓨팅 단위인 수퍼칩의 원가는 3만8902달러(약 5540만원)인데, 이 중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4와 소캠2(SOCAMM2)가 2만4297달러(약 3460만원)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10일 조선비즈가 입수한 글로벌 투자은행(IB) UBS의 베라 루빈 수퍼칩 부품명세서(BOM) 분석에 따르면 HBM4와 인터포저·첨단 패키징·주변 부품 등 루빈 GPU 관련 원가는 9247달러(약 1317만원)로 추산됐다. 소캠2를 포함한 베라 CPU는 2만59달러(약 2856만원), 기타 보드 부품은 350달러(약 50만원)로 분석됐다.
루빈 GPU에 탑재되는 HBM4 비용은 4943달러(약 704만원)로 전체 원가의 12.7%로 추정됐다. 베라 CPU에 연결되는 소캠2는 1만9355달러(약 2756만원)로 49.8%를 차지했다. HBM4보다 CPU용 메모리 원가 비중이 훨씬 큰 구조다.
◇ 머스크 "최고의 아키텍처"… 판매 호조 기대
베라 루빈에 대한 시장 반응은 긍정적이다. 엔비디아는 지난달 구글 클라우드·마이크로소프트(MS) 애저·오라클 클라우드·코어위브·네비우스 등에서 베라 루빈 NVL72가 가동 중이라고 밝혔다.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최고경영자(CEO)도 지난 4일 실적 발표에서 베라 루빈을 "최고의 아키텍처"라고 평가하고 AI 인프라를 엔비디아 GPU 중심으로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스페이스X는 올해 말 2기가와트(GW) 이상의 컴퓨팅 인프라를 확보하고 내년 말에는 10GW에 가까운 수준으로 늘리는 게 목표다.
시장에서는 이런 시스템 구축과 대형 수요처의 구매 계획을 베라 루빈의 판매 호조가 이어질 수 있다는 신호로 보고 있다. 블랙웰에 이어 베라 루빈 판매량까지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메모리 3사(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의 엔비디아향 메모리 매출도 커진다. 메모리 3사는 HBM4뿐 아니라 소캠2와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까지 제품군을 넓히고 있다.
◇ GB300 53%→베라 루빈 62%… 차이 키운 소캠2
전작인 블랙웰 울트라 기반 GB300의 전체 원가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53%로 추산됐다. 베라 루빈과 비교하면 메모리 반도체 비중이 9%포인트(P) 높아진 것이다. UBS는 GB300 수퍼칩의 전체 원가를 1만8203달러(약 2592만원), 메모리 원가를 9714달러(약 1383만원)로 추산했다. 전작 대비 베라 루빈 전체 원가는 약 2.1배로 늘었지만, 메모리 비용은 2.5배로 증가해 상승 폭이 더 컸다.
메모리 원가 비중 상승을 이끈 핵심은 소캠2다. 루빈 GPU 하나에는 12단 HBM4 8개가 들어가 총 288기가바이트(GB)를 제공한다. 블랙웰 B200의 HBM3E 192GB보다는 50% 많지만, 블랙웰 울트라 B300의 288GB와는 같은 용량이다. 반면 베라 CPU는 최대 1.5테라바이트(TB)의 LPDDR5X를 지원한다. 전작인 그레이스 CPU의 최대 480GB보다 3배 이상 많다.
소캠2는 스마트폰·태블릿·노트북에 주로 쓰이는 저전력 D램 LPDDR5X를 AI 서버용으로 모듈화한 제품이다. 여러 D램을 묶어 CPU 가까이에 배치하고 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HBM보다 대역폭은 낮지만 적은 전력으로 대용량을 구현할 수 있고, 서버용 DDR5 레지스터드 듀얼인라인메모리모듈(RDIMM)보다 대역폭과 전력 효율이 높다.
베라 루빈 NVL72는 루빈 GPU 72개와 베라 CPU 36개를 하나의 서버 랙에 묶은 AI 시스템이다. 한 랙에는 HBM4 20.7TB와 CPU용 LPDDR5X 54TB 등 총 74.7TB의 D램이 들어간다. 프리미엄 스마트폰 한 대에 통상 12GB의 LPDDR5X가 탑재되는데, 베라 루빈 NVL72 한 랙에 들어가는 CPU용 LPDDR5X 용량만 스마트폰 약 4500대 분량 수준인 셈이다.
◇ HBM서 소캠2·eSSD까지… 공급 범위 확대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은 HBM에서 저전력 D램과 스토리지로 공급 범위를 넓히고 있다. 삼성전자는 HBM4와 소캠2, 스토리지용 PM1763을 '엔비디아용 메모리 제품'으로 소개했다. SK하이닉스는 10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6세대(1c) LPDDR5X를 적용한 192GB 소캠2를 양산하고 있다. 마이크론도 지난 3월 베라 루빈용 12단 36GB HBM4와 192GB 소캠2의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다만 메모리 공급 부족에 따른 엔비디아의 사양 조정은 메모리 3사 실적에 변수로 꼽힌다. IT매체 디인포메이션은 엔비디아가 차세대 GPU '루빈 울트라'의 HBM 용량을 당초 계획보다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몇 주간 최소 3종의 샘플을 시험했고, 일부는 처음 공개한 것보다 적은 메모리가 탑재된 것으로 전해졌다.
엔비디아는 당초 루빈 울트라 GPU 한 개에 7세대 HBM(HBM4E) 1TB를 탑재하는 구상을 공개했다. HBM4E 스택 16개를 적용하는 설계다. 그러나 시험 중인 일부 샘플은 192GB, 다른 제품은 256GB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양산 중인 루빈 GPU의 HBM4 288GB보다도 적다. 공급사들이 출시 시점까지 충분한 HBM4E를 생산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사양 조정 배경 중 하나로 거론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도 엔비디아가 루빈 울트라의 HBM 구성을 여러 형태로 검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존 12단 HBM4E 외에 8단 HBM4E와 12단·8단 HBM4까지 후보에 포함했다는 것이다. 또 LPDDR5X 공급 부족이 2027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을 고려해 베라 루빈 수퍼칩의 소캠 용량도 초기 계획의 절반 수준으로 낮췄다고 전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성능에 타협이 없는 엔비디아가 스펙을 일부 양보한 것은 메모리 기업의 공급사 우위 구조가 반영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며 "AI 가속기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일극 구도가 조금씩 깨지고 있지만 여전히 AI 메모리 시장에서 가장 큰 수요처라서 공급사별 물량 배분이 메모리 3사의 실적 개선 폭을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