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인공지능(AI) 시장 초기에 엔비디아와의 강력한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장기공급계약(LTA)을 앞세워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선점했지만 동시에 기회비용을 치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인프라 투자 열풍으로 범용 D램, 차세대 HBM인 6세대 HBM(HBM4) 가격이 치솟고 있는 가운데 SK하이닉스의 가장 큰 고민은 생산라인의 적지않은 부분이 수익성이 낮아진 5세대 HBM(HBM3E)에 묶여있다는 것이다.
AI 인프라 투자가 에이전틱 AI 확산과 함께 올해에 이어 내년까지 견조하게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수익성 중심의 생산라인 전환 속도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AI 인프라 시장 확대 초기에는 엔비디와의 파트너십이 최선의 전략이었지만, 시장 환경이 예상보다 빠르게 바뀌면서 초기 선택의 기회비용도 함께 부각되고 있다.
◇ 추격자였던 SK… "가격보다 물량" 선택
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HBM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던 초기 SK하이닉스의 최우선 과제는 가격보다 안정적인 물량 확보였다. 당시 삼성전자가 아직 HBM 시장에서 본격적인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SK하이닉스는 사실상 엔비디아의 핵심 HBM 공급사 역할을 맡았다. 엔비디아 역시 HBM뿐 아니라 TSMC 첨단 패키징(CoWoS), 실리콘 인터포저 등 AI 반도체 공급망 전반에서 생산능력을 선제 확보하는 전략을 펼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메모리 산업은 수조원 규모의 설비투자가 선행돼야 하는 대표적인 장치산업이다. 이 때문에 단기적인 가격을 극대화하기보다 안정적인 수요를 확보해 투자 가시성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SK하이닉스 전직 임원은 "삼성전자는 기존 메모리 시장 1위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전략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SK하이닉스는 추격자 입장에서 엔비디아와 초기부터 강한 공급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며 "설비투자가 많이 필요한 산업인 만큼 최고의 가격보다 확실한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당시에는 더 중요한 전략이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전략은 HBM 시장 선점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으며 HBM 시장 주도권을 확보했고, 이를 기반으로 AI 메모리 시장 성장의 최대 수혜 기업으로 평가받았다.
◇ 시장이 바뀌었다… HBM 선점의 기회비용
하지만 시장은 예상보다 빠르게 변했다. 올해 들어 범용 D램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했고, AMD를 비롯해 메타·구글 등 빅테크들의 HBM4 수요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초기에는 특정 고객과 안정적인 장기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경쟁력이었다면, 이제는 다양한 고객과 제품군에 생산능력을 얼마나 유연하게 배분할 수 있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최근 보고서에서 SK하이닉스가 경쟁사보다 먼저 체결한 장기공급계약을 올해 2분기 D램 시장 점유율 하락 요인 가운데 하나로 분석했다. SK하이닉스는 2분기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지만 D램 시장 점유율은 26%로 낮아졌고, 삼성전자는 범용 D램 가격 상승과 HBM 확대 효과에 힘입어 39%로 1위를 차지했다. 특히 3위 마이크론이 범용 D램 반등에 힘입어 점유율을 25%까지 바짝 끌어올리면서, SK하이닉스와의 2위 격차는 단 1%포인트 차이로 좁혀졌다.
카운터포인트는 2분기 범용 D램 가격이 급등한 반면, HBM 시장은 기존 HBM3E 제품의 단가 조정과 HBM4 출하 전 세대교체 공백이 맞물려 평균판매가격(ASP)이 일시적으로 주춤했다고 분석했다. HBM 매출 비중이 높은 SK하이닉스가 이 같은 단가 조정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크게 받은 데다, 선제적으로 체결한 LTA 고정 가격 구조로 인해 범용 D램가 폭등장의 수혜를 경쟁사만큼 즉각 반영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 진화하는 LTA, 다음 승부는 유연성
SK하이닉스도 현재의 LTA는 과거와 같은 단순 고정가격 계약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회사는 지난 2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고객과 제품 특성에 따라 계약 기간과 가격 산정 방식을 다르게 설계하고 있으며, 장기계약을 통해 실적의 하방 안정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시장이 우호적일 경우 추가 수요와 가격 상승 기회도 활용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당사의 계약은 원가 경쟁력을 감안한 충분한 수익성, 차세대 메모리 공동개발, 안정적인 공급 등을 고려한 장기 협력 파트너십"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 역시 최근 공급 부족으로 협상력이 메모리 업체로 이동한 이후 5년 롤링 방식의 장기공급계약 확대에 나서고 있다. 업계에서는 양사의 차이는 계약 자체의 우열이라기보다 당시 시장에서 처한 위치와 전략적 선택의 차이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초기 AI 시장에서 엔비디아 공급망을 선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며 "현재는 엔비디아 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도 AMD·메타 등 신규 고객의 HBM4 수요에 얼마나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지가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