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을 몇 년치씩 미리 계약해두는 장기공급계약(LTA)이 반도체를 넘어 반도체 기판,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등 부품업계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특히 최소구매물량, 가격 상·하한, 선수금, 물량을 다 가져가지 못해도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의무인수(Take-or-Pay) 조건까지 결합되면서 계약 구조가 예전보다 훨씬 촘촘해졌다.

다만 이같은 공급자 우위 시장의 수혜를 보는 기업은 제한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AI 인프라 확대의 수혜가 대규모 계약을 감당할 수 있는 대기업에 한정되는 반면, 여력이 부족한 중소 부품사는 빅테크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성장 기회 자체가 사라지는 구조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전기 수원 사업장(왼쪽)과 LG이노텍 본사./각 사

4일 독립리서치기업 그로쓰리서치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LTA는 단순히 계약기간을 늘리는 수준을 넘어 최소구매물량과 가격 상·하한, 선수금, 의무인수 조건 등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메모리 반도체, 기판, 전력설비 가운데 하나만 제때 공급되지 않아도 구축 일정 전체가 밀릴 수 있어, 빅테크들이 공급망 전반에서 생산능력을 미리 묶어두려는 상황이라는 분석이다.

◇ 부품업계 전반으로 번지는 장기계약…대기업엔 성장 기회

장기계약 확산은 최근 발표된 국내 대형 부품사의 실적과 사업 전략에서 확인된다. 삼성전기는 하이퍼스케일러를 포함한 10여 곳의 고객사와 MLCC 장기계약을 체결했고, 글로벌 빅테크와는 1조5000억원 규모의 실리콘커패시터 공급계약도 확보했다. 고성능 반도체 패키지기판인 플립칩볼그리드어레이(FC-BGA) 부문에서도 고객사의 투자 지원을 포함한 전략적 장기계약을 협의하고 있다.

LG이노텍 역시 고부가 기판을 중심으로 장기계약 범위를 넓히면서, 신규 설비 투자 자체를 고객사와의 계약을 전제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사업 구조를 바꿨다. 데이터센터용 전력기기 시장에서도 같은 흐름이 나타난다. HD현대일렉트릭은 글로벌 테크기업과 1조1000억원 규모의 전력기기 장기계약을 확보하며 전력설비 시장까지 LTA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 대기업의 공통점은 자체 자금과 신용도를 바탕으로 먼저 투자에 나서고 이후 물량으로 회수하는 여력을 갖췄다는 점이다. 고객사가 요구하는 계약 조건이 까다로워질수록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재무 체력을 갖춘 기업에는 오히려 안정적인 매출을 선점하는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 "중소업체는 선수금 없인 물량 감당 못해"

반면 자본 여력이 부족한 중소 부품사가 처한 상황은 다르다. 테스트소켓을 만드는 ISC가 대표적인 사례다. ISC는 고객사가 미리 지급한 선수금을 밑천 삼아 AI 전용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있다. 올해 장기계약 기반 매출 비중이 50%를 넘어설 전망이고, 생산능력도 올해 200만개에서 2029년 500만개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겉보기에는 빠른 성장이지만, 뒤집어 보면 고객사의 선수금 없이는 이만한 규모의 생산능력 확장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형 부품사가 자체 자금으로 먼저 투자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중소업체는 빅테크의 계약이 확정돼야만 비로소 생산능력을 늘릴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국내 중소 부품사 관계자는 "대형 고객사와 계약을 따내려면 기술력과 자본력을 동시에 갖춰야 하는데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기업이 많지 않다 보니 계약을 따내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선수금을 받아 라인을 지은 중소업체는 계약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사업이 돌아가는 구조다. LTA를 감당하지 못하는 업체는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밀려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