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빅테크 4사(알파벳·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가 올해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규모를 재차 높여 잡으면서 메모리 수퍼사이클(초호황기)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에 다시 힘이 실리고 있다. 이들 기업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서버용 D램,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등 AI 서버용 메모리·저장장치의 최대 고객군으로 꼽힌다.
3일 알파벳·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MS)의 최근 실적 발표 내용을 종합하면 빅테크 4사가 제시한 올해 자본지출(CapEx·설비투자) 합산 전망은 7200억~7450억달러(약 1041조1200억~1077조2700억원)다. 기존 전망치 합산액 6950억~7250억달러(약 1004조9700억~1048조3500억원)보다 하단은 250억달러(약 36조1500억원), 상단은 200억달러(약 28조9200억원) 높아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서비스 수익화가 투자비 증가를 따라가지 못해 설비 확대 속도가 둔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빅테크 4사가 되레 규모를 늘리면서 'AI 거품론'이나 '메모리 피크아웃(정점 통과)' 우려가 완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 AI 데이터센터 확충 나선 빅테크 4사… "AI 수요 증가 대응"
구글 모회사 알파벳은 연간 설비투자 전망을 1800억~1900억달러(약 260조2800억~274조7400억원)에서 1950억~2050억달러(약 281조9700억~296조4300억원)로 올렸다. 아나트 애슈케나지 알파벳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늘어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설비 공급을 앞당긴 것이 전망 상향의 주된 이유"라고 말했다.
아마존은 2000억달러(약 289조2000억원)였던 연간 투자 계획을 2200억달러(약 318조1200억원)로 확대했다. 앤디 재시 아마존 최고경영자(CEO)는 "2200억달러를 투자하더라도 올해 수요를 모두 충족할 용량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메타는 1250억~1450억달러(약 180조7500억~209조6700억원)였던 전망 범위를 1300억~1450억달러(약 187조9800억~209조6700억원)로 조정했다.
MS는 리스 회계 변경으로 연간 투자금이 1900억달러(약 274조7400억원)에서 1750억달러(약 253조500억원)로 낮아졌지만, 실제 계획에는 변화가 없다고 설명했다. 2027회계연도 설비투자는 전년보다 늘고, 7~9월 지출도 500억달러(약 72조3000억원)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했다.
◇ 올 2분기에만 약 246조원… 견조한 AI 수요 확인
빅테크 4사가 올해 2분기에 집행한 설비투자성 지출은 총 1700억8000만달러(약 245조9400억원)다. 1분기 1306억5000만달러(약 188조9200억원)보다 30.2% 증가했다. MS는 "고객 수요가 가용 용량을 계속 웃돈다"고 밝혔다. MS가 이 기간 집행한 설비투자의 약 3분의 2는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내용연수가 짧은 자산에 투입됐다.
시장에서는 실제 AI·클라우드 수요 증가가 확인되면서 빅테크 4사가 설비투자를 늘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올 2분기 MS의 애저와 기타 클라우드 서비스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43% 증가했다. 아마존웹서비스(AWS)는 37%, 구글클라우드는 82% 성장했다. 메타의 광고 매출도 AI 기반 추천·광고 시스템 개선에 힘입어 27% 늘었다.
한 시장조사업체 연구원은 "수요가 없는 상황에서 데이터센터만 과도하게 짓고 있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있는 실적"이라며 "클라우드 매출과 계약 잔고, 사용량이 함께 늘면서 빅테크 4사가 확보한 AI 데이터센터의 여유 용량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2년 만에 하이퍼스케일러 메모리 지출 10배 증가… 내년 설비투자의 73% 차지"
미국 빅테크 4사는 메모리 반도체를 직접 구매하거나 GPU 가속기와 서버·저장장치를 발주해 HBM과 D램, 낸드플래시의 실제 투입량을 좌우하는 곳으로 꼽힌다. 글로벌 투자은행(IB) UBS에 따르면 이들이 포함된 상위 11개 하이퍼스케일러(대형 데이터센터 운영사)는 AI 서버용 HBM과 더블데이터레이트(DDR) 계열 D램 수요의 약 90%를 차지한다. 범용 서버용 DDR 계열 D램과 서버·스토리지용 낸드에서도 비중이 약 80%에 달한다.
UBS는 이들의 메모리 지출이 작년 728억달러(약 105조2700억원)에서 올해 3356억5700만달러(약 485조3600억원)로 증가한 뒤 내년에는 7613억1700만달러(약 1100조86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전체 설비투자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율도 같은 기간 14%에서 38%, 73%로 상승할 것으로 봤다.
UBS는 상위 11개 하이퍼스케일러의 내년 품목별 지출 예상액으로 ▲HBM 1443억8400만달러(약 208조7800억원) ▲DDR 계열 D램 4488억6200만달러(약 649조500억원) ▲낸드플래시 1680억7100만달러(약 243조300억원)를 제시했다. HBM뿐 아니라 서버와 저장장치에 들어가는 제품 전반으로 수요가 확산한다는 의미다.
앞서 일본계 금융회사 노무라도 데이터센터에서 파생되는 메모리 수요가 2026년 4540억달러(약 656조4800억원)에서 2030년 1조3980억달러(약 2021조5100억원)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메모리 제조사들도 상승 사이클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서버용 D램과 eSSD, HBM 수요 증가가 빨라지면서 공급 부족 현상은 지속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SK하이닉스 역시 "주요 빅테크 고객들은 AI 서비스 사용량 증가와 컴퓨팅 용량 부족으로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고 있고, AI 서비스에서 창출되는 매출과 수익 성장을 바탕으로 메모리 구매를 지속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실제 주요 고객들도 여전히 더 많은 메모리 공급을 요청하고 있다"고 했다.
메모리 반도체 품귀가 이어지면서 계약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핵심 고객을 포함한 10여곳과 장기공급계약(LTA) 협상을 마쳤다. 가격 변동에 대응하는 구조와 예치금 등 이행 장치를 포함해 중장기 수요 가시성을 높인 것이다. 삼성전자도 "거의 모든 고객사가 다년간 공급 계약을 요청하고 있다"며 세계 5대 데이터센터 기업과 계약을 맺었고, 다른 주요 고객사 5곳과도 협상을 마무리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빅테크의 투자 확대가 HBM에 그치지 않고 서버용 D램과 eSSD까지 수요를 끌어올리면서 이번 상승 사이클은 과거보다 길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