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가 극자외선(EUV)을 넘어 심자외선(DUV) 노광장비까지 확대되면서 중국의 반도체 장비 자립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이 자체 개발한 DUV 노광장비를 생산라인에 투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증시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반도체 관련 종목이 일제히 약세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30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시장의 우려와 중국의 실제 기술 수준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이 DUV 장비 국산화에는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뤘지만, 인공지능(AI) 반도체와 고대역폭메모리(HBM)에 필요한 첨단 공정에서는 여전히 넘기 어려운 기술 장벽이 남아 있다는 분석입니다.
노광장비는 반도체 회로를 웨이퍼 위에 그리는 장비로, 흔히 반도체 공장의 '프린터'로 불립니다. 미세한 회로를 얼마나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느냐에 따라 반도체 성능이 결정되기 때문에 반도체 제조 공정의 핵심 장비로 꼽힙니다. 현재 AI 반도체에는 EUV 장비가 사용되지만 자동차용 반도체와 전력반도체, 범용 D램 등 성숙 공정에서는 DUV 장비가 여전히 널리 활용됩니다.
중국 반도체 장비업체 상하이마이크로전자(SMEE)는 자체 개발한 28나노미터(㎚)급 DUV 노광장비 'SSA800'을 SMIC와 화홍반도체 등 주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회사에 공급하며 성숙 공정 장비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자동차용 반도체와 전력관리반도체(PMIC), 마이크로컨트롤러(MCU) 등 레거시 반도체 생산에는 일정 수준의 양산성을 확보하면서 네덜란드 ASML 장비 의존도를 일부 낮추기 시작했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다만 '국산화 성공'이 곧 ASML을 따라잡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장비 성능을 살펴보면 한계도 분명합니다. SSA800의 웨이퍼 처리량은 시간당 150장으로 ASML 동급 장비(275장)의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 오버레이 정밀도 역시 뒤처집니다. 28㎚ 공정에서는 안정적인 수율을 확보할 수 있지만, 14㎚ 이하 공정에 필요한 이중·다중 패터닝을 적용하면 수율이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업계에서는 첨단 로직 반도체와 AI 반도체 양산에는 여전히 기술적 제약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중국 DUV 장비는 자동차용 반도체나 범용 메모리 등 레거시(구형) 제품 생산에는 활용할 수 있지만, 엔비디아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HBM이나 최첨단 AI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초미세 공정에 필요한 액침식(ArF Immersion) DUV와 EUV 기술은 아직 완전한 국산화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광학계와 광원 안정성 등 핵심 기술 난도가 높아 단기간 내 ASML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미국도 중국의 추격을 차단하기 위한 규제를 한층 강화하고 있습니다. 미국 의회는 DUV 장비 판매뿐 아니라 유지보수와 부품 공급까지 제한하는 MATCH 법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법안이 시행될 경우 중국이 이미 도입한 DUV 장비의 장기 가동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됩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중국 최대 D램 업체 창신메모리(CXMT)의 움직임도 주목됩니다. CXMT는 최근 대규모 기업공개(IPO)를 통해 투자 재원을 확보하고 DDR4와 DDR5 등 범용 메모리 생산 확대에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HBM은 상황이 다릅니다. EUV 없이 DUV 다중 패터닝만으로는 생산 수율 확보가 쉽지 않고, TSV 적층과 발열, 장기 신뢰성까지 확보해야 하는 만큼 단기간 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따라잡기는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입니다.
중국의 추격은 한국 메모리 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범용 D램 시장에서는 중국 업체들의 공급 확대가 가격 경쟁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의 대중국 규제로 삼성전자 시안 공장과 SK하이닉스 우시·다롄 공장의 첨단 공정 업그레이드가 제한되면서 중국 생산거점 운영 전략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습니다.
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범용 메모리 비중을 줄이고 HBM4와 차세대 D램, 첨단 패키징 등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빠르게 재편하고 있습니다. 평택과 용인 등 국내 생산거점에 EUV 기반 투자를 집중하면서 AI 메모리 시장에서 기술 격차를 더욱 벌리겠다는 전략입니다.
중국의 DUV 국산화는 레거시 반도체 분야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됩니다. 단기간에 AI 반도체와 HBM 시장의 경쟁 구도를 뒤흔들 수준은 아니라는 분석이 우세하지만, 장비 국산화와 메모리 생산 확대가 지속될 경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과 가격 경쟁 구도에는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중국의 기술 고도화 속도와 미국의 추가 규제, 그리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초격차 전략이 향후 경쟁 구도를 좌우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