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태양유전(타이요유덴)의 다카사키 글로벌센터 전경./태양유전

글로벌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3위 업체인 일본 태양유전(타이요유덴)이 오는 9월 출하분의 가격을 추가로 올려 달라고 고객사에 요청했다. 가격을 조정하더라도 납기에 맞춰 공급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도 전달했다.

인공지능(AI) 서버용 고용량 MLCC 생산이 늘면서 범용 제품의 공급 여력까지 줄어드는 가운데 나온 조치다. 업계에서는 태양유전의 움직임이 삼성전기·무라타의 MLCC 가격 정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무라타는 전체 MLCC 시장의 약 40%를 점유하고 있다. 삼성전기의 자체 추정 기준 작년 시장 점유율은 약 23%다.

◇ 9월 출하분 추가 인상… 기존 방침 한 달 만에 선회

29일 조선비즈가 입수한 태양유전의 지난 23일자 공문에 따르면 회사는 오는 9월 1일 출하분부터 MLCC 가격을 조정해 달라고 고객사에 요청했다. 인상 사유로는 원자재와 부자재 가격 상승을 들었다. 태양유전은 공문에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그동안 비용 절감을 위해 최대한 노력했으나, 자체적인 노력만으로는 비용 상승분을 모두 흡수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고 했다.

태양유전은 지난달에도 고객사에 한 차례 가격 조정을 요청했다. 그런데도 원가 부담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져 추가 인상이 필요하다고 거래처에 전달한 것이다. 회사 측은 "이번 가격 조정 요청을 받아들이더라도 납기에 맞춘 공급을 약속할 수 없다"며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조정하겠다"고 했다.

태양유전의 가격 조정은 올해 들어 반복되고 있다. 회사는 지난 4월 중국 유통망을 대상으로 소비자용 제품과 일부 전장용 MLCC 가격을 6~13% 올렸다. 5월 1일부터는 거래처에 공급하는 일부 MLCC와 인덕터, 페라이트 비드 등의 가격도 인상했다.

이번 추가 인상 요청은 "수급 부족을 이유로 가격을 더 올릴 계획은 없다"던 기존 입장에서 한 달여 만에 선회한 것이기도 하다. 사세 가쓰야 태양유전 사장은 지난달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 단계에서는 수급이 빠듯하다는 이유로 가격을 올릴 계획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산화지르코늄을 비롯한 세라믹 소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MLCC 업체의 원가 부담이 커진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태양유전이 기존 입장을 바꿔 추가 인상에 나설 수 있었던 데에는 MLCC 공급 부족이 제품군 전반으로 확산한 점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AI 서버용 수요 급증… 범용 MLCC 공급 압박

MLCC는 전기를 일시적으로 저장했다가 방출해 전자회로의 전압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전자기기 내 불필요한 신호인 노이즈를 제거하는 부품이다. 스마트폰·PC·가전은 물론 자동차·산업기기 등 대부분의 전자제품에 들어간다. 최근에는 AI 서버를 중심으로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고성능 연산장치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려면 많은 수의 고용량 MLCC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현재 AI 데이터센터에 도입되고 있는 엔비디아의 블랙웰 기반 GB200 연산 보드에는 MLCC 6500여개가 들어간다. 올 하반기 공급이 본격화되는 차세대 베라 루빈 기반 보드는 전력 소모가 늘고 전력 관리 회로가 복잡해지면서 MLCC 탑재량이 약 1만2000개로 증가할 전망이다.

일본 태양유전(타이요유덴)이 생산하는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제품./태양유전

AI 서버용 고사양 MLCC 시장은 무라타와 삼성전기가 주도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AI 서버용 MLCC 시장 점유율을 무라타 45%, 삼성전기 40%, 나머지 업체 15%로 추정한다. 태양유전도 AI 서버용 제품을 생산하지만, 업계에서는 두 회사와 비교해 초고사양 제품 시장의 점유율이 낮고 스마트폰·PC 등 IT 기기에 쓰이는 범용 제품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업체로 본다.

업계에서는 태양유전의 잇단 가격 조정을 AI 서버용 고사양 제품에서 시작된 공급 부족이 범용 MLCC 시장으로 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한다. AI 수요가 늘면서 한국과 일본 업체들이 생산능력을 고부가 제품에 우선 배정하고, 범용 제품의 공급 여력이 줄어 품귀 현상이 MLCC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수주 지표에서도 확인된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수주액을 출하액으로 나눈 수주·출하 비율(BB ratio)은 삼성전기 1.31, 무라타 1.30, 태양유전 1.25였다. 세 업체 모두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업계 전체 BB 비율도 1.04를 기록했다. BB 비율이 1을 넘으면 새로 들어온 주문이 실제 출하보다 많아 수주 잔고가 쌓이고 있다는 뜻이다. 수치가 높을수록 납기가 길어지고, 공급업체가 가격 협상에서 우위를 확보할 가능성도 커진다.

◇ 범용 생산 여력 감소… 삼성전기·무라타 협상에도 영향

무라타와 삼성전기가 MLCC 가격을 동결한 것은 아니다. 삼성전기의 MLCC 평균판매가격(ASP)은 지난해 전년 대비 0.9% 오른 데 이어 올해 1분기에는 8.1% 상승했다. 다만 업계에서는 태양유전이 무라타·삼성전기보다 범용 제품의 가격 인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본다. 시장 1·2위 업체가 AI 서버용 고사양 제품에 생산 능력을 집중하면서 범용 시장에서 태양유전의 상대적인 영향력이 커졌다는 해석이다.

범용 MLCC의 공급 여력은 앞으로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기는 지난 6월과 7월 글로벌 대형기업과 각각 4540억원, 2951억원 규모의 MLCC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AI 서버용 고용량 제품 공급이 빠듯해지면서 고객사가 장기 물량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된다. 증권가에서는 두 건의 AI 서버용 MLCC 계약 물량을 범용 제품 기준으로 환산하면 삼성전기의 2027년 예상 세라믹 생산 능력 가운데 약 10%를 차지할 수 있다고 추정한다. 무라타 역시 AI용 MLCC 생산 비중을 높이면서 범용 제품에 배정할 수 있는 생산 능력이 줄어들고 있다.

3위 업체인 태양유전이 추가 인상에 나서면서 무라타와 삼성전기도 고객사와의 협상에서 판가를 높이는 데 따른 부담을 덜게 된 분위기다. MLCC 제조사는 제품 규격과 공급 물량, 계약 기간 등에 따라 고객사와 가격을 개별 협상한다.

업계 관계자는 "MLCC 가격은 고객사별 협상으로 결정돼 업체들이 가격 인상 여부를 공식화하기 어렵다"며 "경쟁사보다 먼저 가격을 올리면 고객을 빼앗길 수 있어 태양유전의 움직임이 삼성전기와 무라타의 가격 전략에도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