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투자 확대와 글로벌 첨단 반도체 공장(팹) 건설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반도체 장비 납기가 길어지고 있다. 앞서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공급망 붕괴로 발생했던 일시적인 장비 부족과 달리, 이번에는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장비 생산능력을 앞지르면서 나타나는 구조적 수급 불균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ASML 극자외선(EUV) 장비가 웨이퍼 위에 회로 패턴을 새기고 있다./ASML 제공

28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AI 반도체 투자 확대 영향으로 전공정과 후공정을 가리지 않고 장비 확보 경쟁이 심화하고 있다.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2027년 생산 물량이 대부분 예약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와 램리서치, KLA 등 전공정 장비업체들도 증착·식각·계측 장비를 중심으로 납기가 기존보다 1.5~2배 늘어난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반도체 장비업체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일부 핵심 장비의 납기는 기존 3~4개월에서 6~8개월 수준으로 길어지면서 고객사들의 선제 발주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BM3E(5세대 HBM) 12단과 HBM4(6세대 HBM) 양산을 위한 TC 본더 역시 주요 메모리 업체들의 발주가 이어지면서 공급이 빠듯한 상황이다.

장비 공급 부족은 노광장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AI 가속기와 HBM 생산 확대를 위해 첨단 공정과 패키징 설비 투자가 동시에 이뤄지면서 장비 수요가 전 공정으로 확산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TSMC, 마이크론 등 주요 반도체 업체들이 생산능력 확대를 추진하면서 장비업체의 수주도 빠르게 늘고 있다.

가장 공급 제약이 큰 장비는 EUV 노광장비다. EUV는 첨단 로직 반도체와 미세공정 D램 생산에 필수적인 장비로 ASML이 사실상 독점 공급하고 있다. ASML은 AI 투자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지만, 이미 2027년 생산 물량 대부분이 예약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는 최근 실적 발표에서 EUV와 심자외선(DUV) 장비 생산능력을 2027년까지 확대하고, 2028년 추가 증설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EUV 공급을 단기간에 늘리기는 쉽지 않다. EUV 장비에는 독일 자이스가 공급하는 초정밀 광학계가 적용되는데, 광학계 생산 확대에도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만큼 장비 공급 역시 빠르게 늘리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공급 제약으로 첨단 공정 장비 부족 현상이 2027~2028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후공정에서도 병목은 뚜렷하다. HBM3E 12단과 HBM4 양산 준비가 본격화되면서 TC 본더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한미반도체를 비롯한 국내 장비업체들이 생산능력 확대에 나서고 있지만 AI 메모리 투자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여전히 공급이 빠듯하다는 평가다. 글로벌 장비업체들도 첨단 패키징 시장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보고 관련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이번 장비 부족이 팬데믹 당시와 가장 다른 점은 원인이다. 2020~2022년에는 물류 차질과 부품 공급난이 장비 부족을 초래했다면, 현재는 AI 데이터센터 구축 경쟁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반도체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구조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주요 반도체 업체들도 장비 납기 증가를 고려해 발주 시점을 앞당기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팬데믹 당시에는 공급망 차질이 장비 부족을 불렀다면, 지금은 AI 반도체 투자 확대가 장비 수요를 끌어올리고 있다. 장비 공급이 당장 생산 확대를 제약할 수준은 아니라는 평가가 우세하지만, AI 투자 기조가 이어질 경우 장비 리드타임이 반도체 업체들의 투자 일정과 생산능력 확대 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