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도체 굴기가 '기술 추격'에서 '시장 대체'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미국 기술에 기대지 않고도 내수 시장에서 발생하는 인공지능(AI) 연산 수요의 상당 부분을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설계·생산 역량이 높아졌다는 평가다. 시제품 개발에 머물던 자국산 반도체가 데이터센터에 투입되고, 상용화의 최대 난제로 꼽히는 양산에서도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수출 규제는 중국의 첨단 AI 반도체와 제조 장비 조달에 제약을 가했다. 실제로 중국은 2025년까지 전체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AI 반도체에서는 앞으로 4년 안에 내수 수요의 대부분을 자체 충당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반도체 핵심 기술 대부분을 국산화한 단계는 아니지만, 외산 첨단 칩 공급이 끊겨도 자국 AI 산업을 운용할 수 있는 체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는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의 AI 반도체 자급률이 2030년 70%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 비율은 2021년 10%에서 2024년 33%로 높아졌고, 지난해에는 42%까지 상승한 것으로 추정됐다.
모건스탠리는 올해 자급률이 41%로 소폭 낮아진 뒤 ▲2027년 49% ▲2028년 59% ▲2029년 67%로 차례로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2024년과 비교하면 6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높아지는 셈이다.
중국 정부는 미국의 견제를 계기로 반도체 설계는 물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장비·소재·메모리·소프트웨어 등 사실상 생태계 전 분야에 대규모 지원에 나섰다. 이에 화웨이·캠브리콘이 AI 가속기를 개발하고,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 중신궈지(SMIC)가 생산을 맡는 구조가 형성됐다. 한국 기업이 주도해 온 D램 시장에서도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범용 제품을 시작으로 공급 영역을 넓히고 있다.
◇ 美 수출 규제가 만든 자국산 칩 수요
미국은 2022년부터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단계적으로 제한했다. 엔비디아의 최신 AI 가속기와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반도체 생산량은 2022년 감소했고, 선단 공정에서도 7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로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만 이런 미국의 조치는 중국 내에서 자체 생산한 칩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중국 빅테크·통신사·국유기업은 성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안정적인 공급을 보장받을 수 있는 화웨이·캠브리콘 제품을 데이터센터에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에 외교·안보·경제 정책을 자문하는 비영리 연구기관도 수출 규제가 결과적으로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앞당겼다고 분석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중국이 2014년 이후 반도체 산업에 약 1500억달러(약 218조원)의 공공자금을 투입했지만, 작년 자국산 반도체가 내수에서 차지한 비중은 약 30%에 그쳤다고 봤다. 당초 중국 정부가 제시한 목표인 70%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만 CSIS는 미국이 수출 제한을 강화한 뒤 중국산 반도체 장비의 자국 내 시장 점유율이 2024년 25%에서 지난해 35%로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식각·박막 증착 장비의 점유율은 40%까지 상승했다. CSIS는 미국의 조치가 중국의 최첨단 기술 접근을 단기적으로 제한했지만, 외국산 칩과 장비를 자국 제품으로 대체하고 설계·생산 체계를 내재화하는 움직임에는 오히려 속도를 붙였다고 평가했다.
◇ 화웨이가 설계하고 SMIC가 생산
화웨이는 중국 AI 반도체 자립을 주도하는 기업으로 꼽힌다. 이 회사는 AI 연산을 담당하는 가속기인 어센드(Ascend)를 서버와 네트워크 장비, 클라우드 서비스, 소프트웨어와 함께 공급하고 있다. 칩 한 개의 처리 능력보다 데이터센터 시스템 전체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엔비디아와의 격차를 줄이는 전략이다.
캠브리콘도 데이터센터용 AI 가속기인 쓰위안(Siyuan) 제품군을 앞세워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알리바바와 바이두 역시 자체 반도체 개발에 나섰다. 딥시크와 즈푸AI 등 AI 모델 개발사까지 전용 칩 설계를 검토하면서 현지 시장은 설계 기업과 인터넷 업체가 동시에 경쟁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중국 업체가 첨단 공정에서 미국 기업에 뒤처져 있지만, 다중 칩 설계·첨단 패키징·서버 단위 구성 등을 활용해 실제 운용 단계의 격차를 좁히고 있다고 분석했다.
설계된 반도체의 생산은 SMIC가 뒷받침한다. 이 회사는 EUV보다 한 세대 이전 기술인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로 회로를 여러 차례 겹쳐 새기는 다중 패터닝 방식을 활용해 7㎚급 제품을 양산하고 있다. 화웨이의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와 어센드 가속기도 이 공정에서 생산된다.
다만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SMIC의 양산 공정이 글로벌 선두 업체보다 4~5년 뒤처진 것으로 평가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대만 TSMC와 삼성전자가 2·3㎚급 제품을 생산 중인 점을 고려하면 기술 격차가 상당하다"면서도 "내수를 중심으로도 충분한 양산 경험을 축적할 수 있고, 정부의 막대한 지원까지 받고 있다는 점은 선두 기업을 추격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 CXMT, 범용 D램부터 시장 대체… "지속적으로 경계해야"
중국의 자립 전략은 연산 반도체에서 메모리로 확산하고 있다. AI 서버를 가동하려면 GPU와 같은 가속기뿐 아니라 연산에 필요한 데이터를 임시로 저장하고 전달하는 D램도 대량으로 필요하다.
중국 최대 D램 업체인 CXMT는 오는 27일 상하이증권거래소 과학기술주 전용 시장인 커촹반에 상장한다. 회사는 기업공개(IPO)를 통해 579억2000만위안(약 11조9000억원)을 조달했다. 초과배정 옵션이 모두 행사되면 공모액은 최대 666억1000만위안(약 13조7000억원)으로 늘어난다. 확보한 자금은 생산라인 증설과 공정 전환, 연구개발 등에 투입된다.
CXMT는 메모리 3사(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와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곧바로 경쟁하기보다 범용 D램부터 공급을 확대하고 있다. 핵심 제품은 5세대 D램 규격인 DDR5와 모바일 기기에 사용하는 저전력 D램 규격인 LPDDR5X다. 중국 스마트폰·PC·서버 업체가 사용하는 메모리 3사 제품을 자국산으로 바꾼 뒤 생산량과 수율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업계에서는 메모리 3사와 CXMT의 D램 기술 격차를 2~3년, HBM은 약 3년으로 추정한다. CXMT는 현재 10나노급 3세대(1z) 공정에서 DDR5를 양산하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10나노급 6세대(1c) D램을 적용한 HBM4(6세대 HBM)를 양산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도 같은 세대 공정으로 DDR5 등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마이크론은 동일 세대에 해당하는 1감마(1γ) 공정 기반 DDR5 샘플을 출하했다.
CXMT가 EUV 노광장비 없이 제조 난도가 높은 DDR5를 양산했다는 점은 성과로 평가된다. 이에 중국의 추격을 지속해서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중국은 범용 D램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운 뒤 이를 기반으로 고사양 HBM 시장에 진입하는 전략을 펼칠 가능성이 크다"며 "중국 정부와 기업이 AI 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어 추격 속도는 갈수록 빨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경쟁력은 생산성·수율·품질을 좌우하는 선제적 투자에서 나오는 만큼 정부의 인프라 지원과 기업의 과감한 투자가 지속돼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