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메모리가 과잉 공급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다'. 수요는 여전히 있다. 다만 이 수요가 실제 소비로 이어질지는 따져봐야 한다."
브루스 베이트먼 옴디아 대만 반도체 수석 애널리스트는 15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열린 '옴디아 테크 포럼 서울 2026'에서 메모리 반도체 피크아웃(정점 통과) 가능성을 묻는 말에 이같이 답했다. 현재 반도체 시장이 정점에 도달한 건 아니지만, 올해가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른 구간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베이트먼 애널리스트는 "메모리 공급 문제는 신규 팹이 건설되고 높은 가동률에 도달할 때까지 해결되지 않는다"며 "현재 팹은 최대로 가동되고 있고 제조사들은 가격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옴디아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 물량이 2027년까지 사실상 판매가 끝난 상태라고 분석했다. 다만 베이트먼 애널리스트는 HBM 가격이 2028~2030년에는 하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메모리 업황이 당장 꺾이기보다는 중장기적으로 가격이 낮아질 수 있다는 의미다.
◇ "올해는 시장 규모 아닌 성장 속도 정점"… HBM 공급 내년까지 빠듯
최근 시장에서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 지속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이른바 '반도체 정점론'이 부각되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AI 가속기와 HBM을 확보하고 있지만, 전력과 용수 부족으로 데이터센터 준공이 미뤄지면 주문이 실제 사용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다.
옴디아는 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이 2024년 6870억달러(약 1026조3800억원)에서 2026년 1조6000억달러(약 2390조4000억원), 2028년 2조1000억달러(약 3137조4000억원)로 확대될 것으로 봤다. 올해 성장률은 전년 대비 87.5%로 예상했다. 성장률은 이후 낮아지지만, 시장 규모는 2028년까지 과거 평균보다 빠르게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베이트먼 애널리스트는 이를 두고 "올해 시장은 규모의 정점이 아니라 성장 속도의 정점"이라고 했다. AI 인프라 구축이 이어지는 만큼 성장률 둔화를 시장 축소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옴디아는 올해 미주 반도체 시장이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중심으로 112% 성장하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TSMC 등이 생산 기반을 둔 아시아·태평양 시장은 87%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옴디아는 메모리가 이런 반도체 시장 성장을 이끌 것이라고 분석했다. 올해 메모리 반도체 시장 매출은 전년보다 250% 증가해 8000억달러(약 1195조2000억원)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베이트먼 애널리스트는 다만 "1조5000억~1조6000억달러(약 2241조~2390조4000억원)라는 숫자는 매출이지 생산된 웨이퍼 규모가 아니다"라며 매출 증가를 생산량 확대와 동일하게 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가격 상승이 시장 외형 확대에 미치는 영향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HBM 수요에 대해서는 "적어도 2027년까지 빠듯할 것"이라며 삼성전자 평택 P4와 SK하이닉스 청주 M15X 증설을 주요 공급 변수로 꼽았다. SK하이닉스 M15X가 높은 가동률에 도달하는 목표 시점은 2027년 중반으로 제시됐다.
베이트먼 애널리스트는 "신규 팹이 완공되기 전에는 공급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며 "중국 D램 기업들도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가격을 낮추는 대신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보다 조금 낮은 수준까지 가격을 올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HBM은 지금 매우 비싸지만 2028년이나 2029년, 늦어도 2030년에는 가격이 내려갈 것"이라고 했다.
베이트먼 애널리스트는 미국 주요 데이터센터 사업 가운데 전력과 용수 문제로 지연되거나 취소될 위험이 있는 규모가 9~12기가와트(GW)에 달한다고 했다. 데이터센터 건설이 무산되면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주문과 여기에 들어가는 HBM 수요도 줄어들 수 있다.
그는 "데이터센터 건설이 중단됐을 때 기업들이 엔비디아 주문을 취소할지, 제품을 받아 창고에 보관할지가 문제"라며 "AI 가속기는 공급 기간이 1년 이상이고 주문을 위해 20억~60억달러(약 2조9880억~8조9640억원)를 선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메모리가 너무 많은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모든 기업이 필요 물량을 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요가 실제인지는 확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한국, 미·중 밖 '제3의 피지컬 AI 공급망' 기회
옴디아는 한국지사 설립 후 처음으로 이날 국내에서 테크 포럼을 개최했다. 베이트먼 애널리스트를 비롯해 ▲리안 제 수 옴디아 싱가포르 AI·로보틱스 수석 애널리스트 ▲조앤 고 옴디아 말레이시아 제조·산업자동화 프랙티스 리더 ▲시라즈 아지즈 옴디아 말레이시아 클라우드·데이터센터 애널리스트 ▲크리스 류 옴디아 중국 신에너지차 선임 애널리스트가 발표를 진행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활동하는 애널리스트 5명은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발전한 AI가 로봇·자동차·제조 설비 등 현실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피지컬 AI(Physical AI)'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 애널리스트는 사족 보행 로봇과 휴머노이드를 합친 체화지능 로봇 출하량이 올해 약 16만6000대에서 2030년 110만대, 2035년 약 500만대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2032년 이후 산업 전반에서 보급이 확대되고, 2035년에는 고급형 제품의 평균 판매 가격이 2만달러(약 2988만원) 아래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수 애널리스트는 중국이 양산 규모와 훈련 데이터에서, 미국이 AI 모델과 원천 기술에서 앞서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려는 국가에 대안을 공급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향후 로봇이 소버린 기술로 다뤄지면 각국은 공급망을 국내에 두거나 적어도 미국과 중국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며 "한국이 미·중 밖의 제3국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반도체·배터리·자동차 부품 공급망과 글로벌 유통·서비스 역량을 강점으로 꼽았다.
수 애널리스트는 한국 정부가 준비해야 할 요소로 ▲인재 육성 ▲기업 간 생태계 협업 ▲고품질 데이터 확보를 꼽았다. 그는 "한국 시장을 위한 로봇을 개발한다면 한국의 작업 환경과 사용자를 반영한 데이터로 모델을 훈련해야 한다"며 "로봇 제조사와 반도체·부품·클라우드 기업이 신속하게 협력할 수 있는 생태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수연 옴디아 한국지사 대표는 환영사에서 "과거 디지털 전환이 기업 경쟁력을 결정했다면 앞으로는 AI와 반도체·데이터·로봇·물리적 인프라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결합하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이라며 "산업 간 협력과 생태계 구축, 인재 양성, 신뢰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이 함께 이뤄져야 피지컬 AI가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