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훈풍에 발주가 많아져 매출이 늘었으니 마진을 일부 양보해달라는 '무언의 압박'을 합니다. 공급망 불안에 원자재값은 오르고 인건비도 부담인데, 정작 공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반도체 소부장 업체 고위 관계자)
"국내 대기업의 이른바 '가격 후려치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수익이 극대화되는 지금도 그런 기조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AI 수요 급증이 나타난 뒤에 외국계 고객사는 태도가 신사적으로 바뀌었는데도 말이죠."(반도체 소부장 업체 마케팅 임원)
13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AI 메모리 수퍼사이클(초호황기)에 역대급 수익성을 기록하고 있지만,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협력사 사이에서는 "일은 늘었는데 마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병목 장비나 AI 반도체 테스트 부품처럼 대체가 어려운 제품을 제조하는 업체는 높은 수익성을 유지하지만, 소재·부품 업체는 원재료비·인건비 상승에도 고객사와의 가격 협상 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아 체감 수혜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올해 2분기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의 평균 영업이익률을 75~80% 수준으로 추정했다. 마이크론은 최근 분기 영업이익률 81%를 달성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비슷한 수준을 나타낼 것이란 분석이다.
◇ 메모리 甲 실적 좋아져도 협력사 乙 수익성 개선 미미
국내 소부장 업체의 수익성은 메모리 대기업과 격차가 크다. 에프앤가이드 컨센서스 기준 올 2분기 영업이익률은 한미반도체 48.5%, 유진테크 20.6%, 솔브레인 16.9%, 원익IPS 11.3%, 주성엔지니어링 9.3% 수준으로 집계됐다. 한미반도체처럼 HBM용 열압착(TC) 본더라는 병목 장비를 쥔 기업은 50%에 가까운 마진을 유지하지만, 이를 제외하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 협력사 상당수는 10~20%대에 머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소부장 업계에서는 이번 반도체 호황을 두고 "낙수 효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보다 확산 속도와 폭이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메모리 대기업의 협력사는 발주·검수·원재료비·납품가 조율 과정에서 마진율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의존도가 높을수록 협상 과정에서 마진 하락 압박을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며 "공장 가동률 상승에 따른 발주량 증가 자체를 혜택처럼 여기는 분위기에서 협상이 이뤄지면 협력사가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메모리 기업의 실적 규모가 커져도 협력사의 수익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 가격 압박 큰 소재·부품… "수퍼사이클 체감 적어"
가격 압박은 장비보다 소재·부품 분야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장비는 대당 가격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아 대량 소모품처럼 단가를 직접 낮추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소재와 부품은 수량 단위로 반복 납품이 이뤄져 고객사 가격 협상력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반도체학과 교수는 "장비는 대당 억 단위라 많이 사면 할인은 있을 수 있지만, 단가를 직접 깎기는 쉽지 않다"며 "소재와 부품은 수량 싸움이라 가격 압박이 더 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도 "원자재값은 오르고 일은 많아졌는데, 공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불만이 장비 기업보다는 소재·부품사에서 더 많이 나온다"고 했다.
일례로 솔브레인은 반도체 소재 매출 비중이 83% 수준이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주요 고객으로 두고 있다. 고객사 공장 가동률이 높아질수록 식각액·화학기계연마(CMP) 슬러리 등 소모성 소재 수요가 늘어난다. 솔브레인의 올 2분기 실적 컨센서스는 매출 2678억원, 영업이익 453억원이다. 영업이익률은 16.9%로 예상됐다. 메모리 시장 상황이 작년보다 뚜렷하게 좋아졌지만, 작년 연간 영업이익률(14.46%)과 비교하면 개선 폭은 미미하다.
동진쎄미켐은 포토레지스트(PR·웨이퍼 위에 회로 패턴을 새길 때 빛에 반응하는 감광액), 신너(포토레지스트 희석·세정에 쓰이는 화학 소재) 등을 생산한다. 동진쎄미켐은 올 1분기 매출 3280억8600만원, 영업이익 665억9300만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3.2%, 영업이익은 39.4% 늘었다. 포토레지스트 판매 확대와 평균판매단가 상승 효과가 반영됐지만, 영업이익률은 20.3%로 전년 동기 16.5%에서 3.8%포인트(P) 오르는 데 그쳤다.
반도체 공정 소모성 부품인 쿼츠(고순도 석영 소재로 만든 공정용 부품)를 생산하는 원익QnC의 올 1분기 매출은 2562억원, 영업이익은 219억원이었다. 전년 동기 매출 2314억원, 영업이익 191억원과 비교하면 매출은 10.7%, 영업이익은 14.6% 늘었다. 그러나 영업이익률은 8.3%에서 8.5%로 제자리걸음이다.
한 시장조사업체 연구원은 "메모리 대기업과 달리 소부장 기업은 체력이 약해 글로벌 공급망 불안과 원재료 가격 상승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고 말했다.
◇ "이익률 전례 없는 수준인데… 협력사 비용 증가 외면"
해외 소부장 기업의 수익성은 국내보다 높은 편이다. 램리서치는 2026 회계연도 3분기(2026년 1~3월)에 매출 58억4100만달러(약 8조8230억원), 영업이익률 35.0%를 기록했다. 이 기간 램리서치 전체 매출의 23%가 한국에서 나왔다.
도쿄일렉트론은 2026 회계연도 4분기(2026년 1~3월)에 매출 7118억엔(약 6조6530억원), 영업이익 2056억엔(약 1조9220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률은 28.9%다. 도쿄일렉트론은 D램 커패시터와 HBM 인터커넥트 등 메모리 주요 공정에서 높은 점유율을 확보해 수익성이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소부장 기업 고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나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협력사들이 '왜 우리만 비용을 떠안느냐'고 느끼는 상황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며 "2017~2018년 메모리 호황기에는 지금보다 이익 규모가 작았는데도 생태계 조성과 협력사 상생을 고려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은 메모리 대기업 이익률이 전례 없는 수준인데도 협력사 비용 증가분을 나누려는 기조는 되레 약해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