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경기장이나 콘서트 공연장처럼 수만명이 모인 곳에선 종종 데이터가 느려지거나 끊기는 현상이 발생한다. 수만 명이 동시에 사진과 영상을 보내면 기지국에 과부하가 걸리기 때문이다. 미국 통신사 AT&T는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을 맞아 월드컵 경기장에 독특한 상품을 도입했다. 추가 요금을 지불한 이용자의 데이터 송수신을 우선 처리하는 '터보 라이브' 상품이다. 놀이기구의 긴 대기 줄을 건너뛰는 놀이공원 패스트 트랙처럼, '데이터 패스트 트랙'인 셈이다.
◇ 돈 내면 데이터도 먼저 간다
12일 AT&T에 따르면, 이 회사는 미국 내 월드컵 경기장 11곳 중 10곳에서 '터보 라이브'를 운영하고 있다. 4강전이 펼쳐지는 댈러스 스타디움·애틀랜타 스타디움, 결승전이 열리는 메트라이프 스타디움 등에서 터보 라이브를 이용할 수 있다.
AT&T는 지난 2월 NFL(미국프로풋볼리그) 결승전 '슈퍼볼'을 맞아 자사 고객을 대상으로 터보 라이브를 처음 도입했고, 북중미 월드컵을 맞아 버라이즌, T모바일 등 경쟁사 고객도 터보 라이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심(eSIM)을 통해 전용 요금제를 이용하는 방식이어서 다른 통신사 이용자도 쓸 수 있다. 가격은 행사 규모에 따라 다르게 책정하는데, 1회 이용권 기준 5~15달러(약 8000~2만3000원)다. 단 5G(5세대 이동통신)망을 이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 기기여야 한다.
AT&T는 "대규모 행사에서 발생하는 지연되고 불안정한 연결은 고객이 겪는 가장 큰 불편 중 하나로, 경기 시작이나 결승골처럼 중요한 순간에 불편이 집중된다"면서 "터보 라이브를 이용하면 축구 팬들이 붐비는 경기장에서도 원활하게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고 택시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IT매체 씨넷은 미국 리바이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호주 대 파라과이 월드컵 조별리그 경기에서 터보 라이브 기능을 써본 결과, "놀라울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고 평가했다. 씨넷은 해당 경기장에서 버라이즌 회선의 다운로드 속도가 최대 714Mbps인 반면 AT&T 터보 라이브 회선의 다운로드 속도는 1690Mbps에 달했다고 전했다.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선 "터보 라이브를 결제하지 않은 AT&T 기존 고객은 우선 순위에서 밀리고, 결과적으로 더 안 좋은 데이터 처리 환경이 된다"는 일부 불만이 나왔다.
◇ 한국은 가능할까… 5G SA 본격화하지만 망 중립성 규제 변수
해외에선 특정 고객의 데이터를 우선 처리하는 상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T모바일은 작년 8월 기업 전용 5G 요금제 '슈퍼모바일'을 출시했다. 네트워크 슬라이스 기술을 적용해 혼잡한 환경에서 이용자들이 트래픽 우선 순위를 갖도록 했다. 네트워크 슬라이스란 하나의 5G망을 여러 개의 가상망으로 나눠, 특정 고객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을 뜻한다. 혼잡한 고속도로에서 버스가 전용 차로로 달리는 것과 같다. 올해 4월 영국 보다폰도 네트워크 슬라이스를 적용한 기업 전용 요금제 '네트워크 부스트'를 출시했다.
미국 3대 이동통신사인 AT&T, 티모바일, 버라이즌은 모두 경찰·소방·응급 의료 등을 대상으로 망 혼잡 상황에서 통신을 우선 처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 같은 데이터 패스트 트랙은 올해 한국이 5G 단독 모드(SA·Stand Alone) 원년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LTE(4세대 이동통신) 망을 함께 사용하는 기존 5G망은 5G 특화 기술인 네트워크 슬라이스를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운데, 5G SA는 LTE와 독립적으로 운영돼 네트워크 슬라이스 적용 확대가 예상된다. 그동안 국내 통신 3사 중에서 5G SA를 상용화한 곳은 KT뿐이었는데,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도 연내 5G SA를 상용화할 예정이다. KT는 최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월드컵 거리 응원 현장에 5G SA에 기반한 네트워크 슬라이스 기술 실증을 진행하며, 행사 진행 요원과 서울시·종로구 공무원에게 일반 이용자와 분리된 전용 네트워크 자원을 할당한 바 있다.
다만 미국은 연방 차원의 망 중립성 규제가 소멸한 반면, 한국은 망 중립성 원칙을 유지하되 일부 예외만 인정하는 방식이어서 규제가 변수다. 서비스 개시를 위해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상 '특수 서비스'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2011년 가이드라인 제정 이후 특수 서비스 요건에 부합한 사례는 지난달 처음으로 나왔다. 대형 재난 상황에서 소방관과 구조 신고자 간 통화를 최우선으로 처리하도록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