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투자 확대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의 가격 결정 공식이 바뀌고 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첨단 공정 가격 인상에 나선 데 이어 삼성전자도 일부 공정 공급 단가를 올렸다. 그동안 고객사 확보를 위한 가격 경쟁이 치열했던 파운드리 시장이 공급자 우위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공정의 성숙도보다 시장 수급이 가격을 결정하는 구조가 강화되고 있다는 평가도 내놓고 있다.

TSMC 로고./로이터연합뉴스

9일 업계에 따르면 TSMC는 최근 엔비디아, 애플, AMD 등 주요 고객사를 대상으로 3나노(㎚)와 5나노 등 최첨단 공정은 물론 고성능 반도체 생산에 활용되는 7나노 공정까지 웨이퍼 공급 단가를 5~10% 인상하는 방침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가 이번 가격 인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인상 폭보다 가격 결정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파운드리 업계에서는 신공정 초기에 높은 가격을 받더라도 수율이 안정되고 생산성이 개선되면 가격을 동결하거나 점진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공정 세대가 바뀔 때를 제외하면 같은 공정의 가격을 다시 올리는 사례는 드물었다.

하지만 AI 투자 확대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의 AI 반도체 주문이 급증하면서 첨단 공정 생산능력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2나노 등 차세대 공정 개발 비용과 첨단 장비 투자 부담까지 커지면서, 공정의 성숙도보다 시장 수급과 투자 비용이 가격을 좌우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TSMC를 중심으로 같은 공정도 시장 상황에 맞춰 가격을 재조정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에도 나타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최근 수요가 몰리는 4나노·5나노 첨단 공정과 자동차용 8나노 일부 노드를 중심으로 신규 고객사 대상 공급 단가를 15% 안팎 인상한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삼성전자의 경우 TSMC처럼 전반적인 가격 인상 기조라기보다 수요가 집중된 일부 공정을 중심으로 단가를 현실화하는 성격이 강하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AI 반도체와 차량용 반도체 수요 증가로 일부 공정의 공급 여건이 개선되면서 가격 협상력이 이전보다 높아졌다고 보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변화가 파운드리 산업의 수익 구조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과거에도 최첨단 공정에서는 기술력을 앞세운 업체들이 가격 협상력을 확보했지만, AI 투자 확대 이후에는 공급 부족이 장기화하면서 생산 업체들의 가격 결정력이 한층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운드리 가격 인상은 반도체 생태계 전반의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웨이퍼 가격에 더해 HBM(고대역폭메모리) 가격 상승과 첨단 패키징 공급 부족까지 맞물리면서 엔비디아와 애플, AMD 등의 제조 원가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장기적으로는 AI 서버 구축 비용뿐 아니라 스마트폰과 PC 등 완성품 가격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제기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과거 파운드리는 고객사 확보를 위해 가격 경쟁을 벌이는 성격이 강했지만 AI 시대에는 첨단 공정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가격 결정력이 공급자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며 "AI 투자 사이클이 이어지는 한 첨단 공정을 중심으로 가격 인상 기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