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을에 빵을 공급하는 빵집이 세 곳뿐이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공교롭게 이 마을에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웨딩케이크 주문이 몰렸고, 세 빵집 모두 수요에 맞춰 오븐을 웨딩케이크 생산으로 돌렸습니다. 그러자 매일 먹는 식빵은 순식간에 품귀 현상을 빚었고, 값은 10배까지 뛰었습니다. 지난달 25일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연방법원에 접수된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상대 D램 가격담합 소송의 논리를, 법조계 전문가들은 이런 비유로 설명합니다. 결혼 열풍이 인공지능(AI) 열풍이라면, 웨딩케이크는 AI 서버에 들어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곧바로 '담합'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현재 국내외 법조계의 중론입니다. 웨딩케이크 주문이 많은데 세 회사가 각자 식빵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 서로 비슷한 선택을 했다면, 이를 법적으로 문제 삼을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2007년 '트웜블리 판결(Bell Atlantic v. Twombly)'을 통해 원고가 담합 소송에서 이기려면 단순히 '가격이 비슷하게 올랐다'는 정황만으로는 부족하고, 소장을 제출하는 단계에서부터 합의의 '개연성(plausibility)'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워놓았습니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인 '기각 신청(motion to dismiss)' 단계에서 소송 자체가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실제 소송에서는 모든 회사가 함께 가격을 올렸다는 사실만으로는 담합 의혹을 제기하기 어렵습니다. 더 직접적인 담합 증거가 필요합니다. 가령 경쟁사끼리 가격이나 생산량처럼 민감한 정보를 주고받은 정황, 업계 협회나 모임 등을 통해 가격을 모의할 기회가 실제로 있었는지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와 같은 명백한 정황 없이 '웨딩케이크가 남는 장사니 나도 오븐을 돌리자'고 각자 판단했다면 처벌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 "'업체간 공모' 확증 없다면 담합 입증 어려워"
미국 법원은 이런 현상을 '의식적 병행행위(conscious parallelism)'라고 부릅니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어렵게 느껴질 단어지만, 쉽게 말해 '합의했다는 증거가 없다면 결과만 보고 처벌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과거에도 비슷한 소송이 있었습니다. 2016~2017년 D램 가격이 급등했을 때도 로펌 헤이건스버먼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을 상대로 유사한 소송을 제기했지만, 2020년 1심에 이어 2022년 3월 제9순회항소법원까지 "피고들의 행위는 담합보다 합법적인 병행행위로 설명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며 기각을 확정한 전례가 있습니다. 원고 측이 내놓은 정황이 법정의 문턱도 넘지 못한 셈입니다.
최근 소송은 미국 소비자 14명과 중소 PC조립·유통업체 3곳이 지난달 25일 캘리포니아 북부연방법원에 제기했습니다. 원고 측은 세계 D램 시장의 약 90%를 점유한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HBM 생산 확대를 명분으로 내세워 구형 D램인 DDR3·DDR4 등 범용 D램 생산을 동시다발적으로 축소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지난 4년간 일반 D램 가격이 약 700% 급등했다는 게 소장의 핵심 내용입니다. 소장은 이런 상황을 '램포칼립스(RAMpocalypse)'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최근 애플이 아이패드와 맥 가격을 인상한 것 역시 이 여파라는 게 원고 측 설명입니다.
물론 과거에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이 승리했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건입니다. 지난 2005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하이닉스반도체는 1999~2002년 실제로 D램 가격을 담합한 사실이 적발돼 미 법무부로부터 각각 3억달러, 1억8500만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고, 당시 일부 임원은 실형을 살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때는 이메일 등 실제 합의를 입증하는 직접 증거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과는 결이 다릅니다.
◇ 원고가 주장하는 'HBM 핑계론', 법원 문턱 넘을까
업계에서는 이번 소송의 뼈대가 2018년 사건과 거의 동일하다고 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가격이 같이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세 회사가 실제로 입을 맞췄다는 걸 보여주는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증거가 있어야 법원의 문턱을 넘을 수 있습니다. 원고 측이 이번에 새로 꺼내든 카드는 HBM 전환이라는 소재인데, 이게 그런 직접적 증거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가 사실상 이번 소송의 유일한 쟁점입니다. 한 반도체 담당 변호사는 "2018년 사건이 기각된 이유는 원고가 '다들 비슷하게 행동했다'는 정황 이상의 증거를 내놓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번에도 HBM 전환 시점이 우연히 겹쳤다는 것만으로는 같은 벽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업 측 반박도 만만치 않습니다. AI 서버발 실수요 폭증이라는 뚜렷한 시장 요인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가격이 오른 건 담합이 아니라 진짜 수요가 폭발했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2018년보다 오히려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여기에 힘을 보태는 정황도 있습니다. 최근 마이크론이 일본 히로시마에, SK하이닉스가 용인에 각각 대규모 증설 계획을 발표했고 삼성전자 역시 투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만약 세 회사가 짜고 공급을 조여왔다면, 굳이 지금 이렇게 큰돈을 들여 생산능력을 늘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소송이 법원의 기각 문턱을 넘어 실제 증거개시(discovery) 단계까지 진행된다면, 세 회사 내부에서 오간 생산 계획 관련 커뮤니케이션이 법정에 공개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2018년 사건이 정확히 같은 논리로 1심과 항소심 문턱을 모두 넘지 못하고 초기 단계에서 종결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소송 역시 본격적인 증거 다툼까지 가지 못하고 이른 단계에서 마무리될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결국 관건은 원고 측이 내놓은 'HBM 카드'가 과거와는 다른 결과를 이끌어낼 만큼 특별한지 여부인데, 지금까지의 판례 흐름만 놓고 보면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