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애플이 중국에서 판매하는 아이폰 등 일부 기기에 중국산 메모리 반도체를 탑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중국 시장 현지화 전략처럼 보이지만, 업계에서는 애플의 속내가 따로 있다고 봅니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메모리 가격이 오르는 가운데,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화웨이 등 현지 업체의 공세가 거세지자 가격 경쟁력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분석입니다.
6일 업계에 따르면 애플은 중국에서 판매하는 일부 제품에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D램과 양쯔메모리(YMTC)의 낸드플래시를 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최근 블룸버그통신은 애플이 중국 판매용 기기에 CXMT와 YMTC의 메모리 부품을 적용하는 방안을 살펴보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도 애플이 중국산 메모리 도입과 관련해 미국 상무부와 백악관, 워싱턴 정가를 상대로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 화웨이 부활에 흔들린 애플의 중국 입지
이 같은 배경에는 중국 시장에서 커진 애플의 위기감이 있습니다. 중국은 애플에 포기하기 어려운 시장입니다. 아이폰 판매량의 상당 부분이 중국에서 발생하고, 생산 기지로서의 중요성도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아이폰 5대 가운데 1대는 중국에서 팔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작년 4분기 애플의 중국 매출은 260억달러(약 40조원)로 전체 매출의 약 18%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애플에 있어 최근 화웨이의 부활은 부담입니다. 화웨이는 미국 정부의 반도체 제재 이후 한동안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에서 주춤했지만, 2023년 자체 칩을 탑재한 신제품을 계기로 빠르게 시장점유율을 회복했습니다. 여기에 중국 소비자의 애국 소비 흐름까지 맞물리며 아이폰의 브랜드 프리미엄은 과거만큼 절대적이지 않게 됐습니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애플은 2023년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점유율 17.3%로 1위였지만, 2024년에는 비보와 화웨이에 밀려 점유율 15%로 3위에 그쳤습니다. 2025년에는 애플이 가까스로 2위까지 올랐지만 1위인 화웨이의 벽은 넘지 못했습니다.
업계는 중국 경기 둔화로 소비 심리도 약해진 상황에서 아이폰 가격이 더 오르면 소비자 이탈이 빨라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달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메모리와 저장장치 비용 상승으로 제품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밝혔습니다.
◇ AI발 메모리 가격 상승, 아이폰 원가 압박으로
문제는 메모리 가격입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주요 메모리 업체들이 수익성이 높은 AI·서버용 제품에 생산과 투자를 우선 배정하면서,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모바일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에도 상승 압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같은 아이폰을 만들더라도 애플이 부담해야 하는 부품 조달 비용이 늘어나는 구조입니다.
과거라면 애플은 막대한 구매 물량을 앞세워 메모리 업체들에 단가 인하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메모리 시장의 힘의 균형이 구매자에서 공급자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메모리 업체들은 AI 서버와 데이터센터라는 새로운 대형 수요처를 확보했습니다. 애플이 아니더라도 고부가 제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이 커진 것입니다. 애플 입장에서는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낮은 가격을 관철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애플이 중국산 메모리를 검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중국 판매용 제품에 한해 현지 메모리를 적용하면 부품 조달 비용을 일부 낮출 수 있습니다. CXMT와 YMTC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할 경우, 애플은 제조원가 부담을 줄이고 중국 시장에서 아이폰 가격 인상 압력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실제 채택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중국 업체를 공급망에 넣을 수 있다"는 선택지만으로 기존 공급사와의 가격 협상에서 유리한 카드를 쥘 수 있기 때문입니다.
◇ 1260H 리스크에도 다시 꺼낸 '중국산 메모리 카드'
물론 현실적인 제약은 큽니다. CXMT는 중국 최대 D램 업체, YMTC는 중국 최대 낸드플래시 업체로 중국 반도체 자립 전략의 핵심 기업입니다. 동시에 두 회사 모두 미국 안보 규제와 맞물려 있는 민감한 기업입니다. 애플이 법적으로 CXMT나 YMTC의 칩을 사는 것이 곧바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두 회사가 미 국방부의 1260H 명단에 올라 있어 평판·규제 리스크가 크다는 점이 핵심 쟁점입니다.
1260H 명단은 미국 국방부가 중국군과 연계됐거나 중국 방위산업 기반에 기여한다고 판단한 중국 기업을 매년 지정해 공개하는 목록입니다. 명단 등재 자체가 즉각적인 거래 금지를 뜻하지는 않지만, 미국 정부가 해당 기업을 안보 위험으로 공식 분류했다는 의미가 있어 미국 기업과의 거래, 투자, 조달 과정에서 중대한 정치·규제 리스크로 작용합니다.
미국 상무부 수출통제 리스크도 별도로 존재합니다. YMTC는 이미 미국 상무부의 수출통제 대상인 Entity List에 오른 바 있습니다. CXMT 역시 향후 더 강한 수출통제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애플은 2022년에도 중국 판매용 아이폰에 YMTC 낸드플래시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미국 의회의 반발에 부딪혀 계획을 접었습니다.
결국 애플의 중국산 메모리 검토는 중국 시장 방어, AI발 메모리 가격 상승, 미·중 기술 갈등이라는 세 압박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입니다. 중국산 메모리가 실제 아이폰 등 애플 제품에 들어갈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품질 검증, 공급 안정성, 미국 정부와 정치권의 반응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다만 애플이 이 카드를 다시 꺼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는 분명합니다. AI 수요가 폭발하면서 메모리 업체들의 협상력이 커졌고, 애플조차 핵심 시장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공급망을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중국산 메모리 카드는 애플의 선택지이자, AI 시대 반도체 시장의 달라진 권력 구도를 보여주는 신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