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인공지능(AI) 시대 급증하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호남권에 첨단 메모리 전공정 팹을 포함한 신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추진하면서 업계 안팎에서 실현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최첨단 평택 캠퍼스에 P4, P5 등 '괴물급' 생산 공장에 용인 클러스터 가동까지 예정돼 있기 때문에 호남 클러스터 추가 투자의 필요성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기도 한다.

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AI 확산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고용량 서버용 D램 수요가 장기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경기 남부 일대에 구축 중인 메가 클러스터만으로도 상당한 수요 대응이 가능하다는 분석과, 장기적인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신규 거점 확보가 필요하다는 시각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광주 북구와 장성면 일대에 AI 중심 도시로 조성 중인 첨단3지구 공사현장./뉴스1

◇ AI가 바꾼 메모리 산업 공식

정부가 신규 거점 확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AI가 촉발한 메모리 산업의 구조적 변화가 있다. 생성형 AI 서비스 확산으로 서버 한 대당 탑재되는 메모리 용량이 급증하고 있으며, 특히 HBM은 공급 부족이 지속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Omdia)는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가 2025년 2000억달러에서 2030년 8000억달러로 확대되며 5년 만에 4배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업계에서는 AI 인프라 확산 속도를 HBM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메모리가 AI 시대 핵심 병목 요소로 부상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AI 인프라 확장과 함께 최첨단 메모리 확보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메모리 업황의 구조적 변화도 가시화되고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위원은 "HBM과 AI 서버용 메모리 비중이 확대되면서 메모리 수요처가 과거보다 훨씬 다양해졌다"며 "메모리 사이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과거 PC나 스마트폰 중심의 D램 시장과는 성격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빅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장기 공급계약이 확대되고 고객 맞춤형 제품 수요가 늘어나면서 과거처럼 단순 생산량 확대를 위한 대규모 증설보다 기존 첨단 생산라인의 효율적 운영과 기술 고도화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팹(공장)이자 EUV(극자외선) 공정이 적용된 삼성전자 평택 2라인 전경./삼성전자 제공

◇ AI 수요 폭증에도 "용인·평택이면 충분"

다만 업계에서는 수요 증가 전망이 곧바로 신규 클러스터 건설의 필요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이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추진 중인 투자 규모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약 360조원을 투입하는 용인 국가산업단지에는 총 6개의 첨단 반도체 팹이 들어설 예정이다. SK하이닉스 역시 122조원을 투자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4개의 대형 팹을 조성할 계획이다. 여기에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의 핵심 확장 라인인 P4와 P5까지 감안하면 생산능력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특히 P5는 클린룸 6개를 갖춘 3층 구조로 계획돼 있어 기존 P4보다 생산 공간이 약 1.5배 큰 초대형 라인으로 평가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메모리 생산 거점은 평택 P4와 P5를 우선순위로 확장하는 방향으로 추진돼 왔으며, 시황과 수요에 맞춰 투자를 집행한다는 원칙에는 변화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 시장조사업체 관계자는 "평택 캠퍼스의 완성판은 P4와 P5"라며 "두 라인이 모두 본격 가동될 경우 최첨단 D램 생산능력이 경쟁사 대비 2.5~3배 수준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빠르면 2027년, 늦어도 2028년에는 P4·P5가 본격 가동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시점이면 AI 인프라 수요가 지속되더라도 메모리 수급은 점차 균형을 찾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업계에서는 용인 10개 팹과 평택 증설 계획이 모두 완료될 경우, AI 시대 메모리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증가하더라도 기존 메가 클러스터 증설만으로 상당 부분 대응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시대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용인과 평택에서 계획 중인 생산능력만 해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라며 "우선은 기존 메가 클러스터를 완성한 뒤 실제 수요 증가 속도를 보면서 추가 투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정부 역시 수도권 클러스터 조성 속도를 높이고 있다. 용인 국가산단의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고 전력·용수 등 기반시설 구축 지원에 나선 상태다. 업계에서는 용인 클러스터의 조기 조성이 향후 국내 메모리 산업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 1100조 청사진, 현실화 조건은

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방 거점을 다변화하고 국가 차원의 산업 기반을 선제적으로 넓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수도권에 생산시설이 지나치게 집중될 경우 자연재해나 대규모 정전 등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박재근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좌교수)은 "반도체 인프라 구축에는 통상 7년 안팎이 걸리는 만큼 산업단지와 기반시설은 선제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며 "대만 역시 인프라를 먼저 구축한 뒤 실제 수요에 맞춰 투자를 집행하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인프라를 미리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실제 팹 투자 여부는 향후 수요와 시장 상황을 보면서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호남권 전공정 팹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이미 추진 중인 용인 클러스터조차 토지 보상과 전력·용수 등 기반시설 구축이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호남 클러스터가 동시에 추진될 경우 국가 인프라 자원과 전문 인력이 분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물류 효율성 역시 변수다. 정부 계획대로 호남에 전공정 팹이, 충남 천안·온양에 후공정 시설이 들어설 경우 웨이퍼 이동이 불가피하다. 업계에서는 생산 거점 간 이동 과정에서 물류 비용 증가와 공급망 운영 효율성 저하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이번 메모리 업사이클이 5년 이상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전공정과 후공정, 협력사 생태계까지 고려하면 우선 기존 메가 클러스터를 계획대로 완성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1100조원 규모의 투자 청사진이 제시된 만큼 향후 집행 과정에서 호남권 전공정 팹이 산업적으로 경쟁력 있는 생산기지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정량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AI 수요 증가 전망뿐 아니라 기존 수도권 메가 클러스터의 증설 여력, 전문 인력 수급, 전후공정 간 물류 효율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