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 (윗줄 왼쪽부터)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재명 대통령,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기선 HD현대 회장./연합뉴스

이재명 정부가 지역균형발전 기조 아래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호남(광주·전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직 공식 발표는 나오지 않았지만 두 회사 모두 기존 용인 클러스터와는 별개로 광주·전남에 전공정 라인을 새로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각에선 투자 규모가 1000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문제는 기업의 명운을 가를 수도 있는 중요한 의사 결정을 유도한 주체가 정부와 정치권이고, 정작 비용을 떠안는 쪽은 기업이라는 점입니다. 생산라인 하나에 수십조원이 필요한 반도체 설비투자는 한번 결정되면 수십년간 고정비로 작동하는데, 호남 클러스터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대한 수요, 기술 트렌드 전망이 아니라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일정에 맞춰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내부적으로는 이 결정이 향후 '비용 폭탄'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 재무·고정비 리스크… 2개 클러스터 동시 가동 부담

가장 먼저 우려되는 지점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발생할 중장기적 재무 부담입니다. SK하이닉스는 2050년까지 용인 클러스터 4기 구축에 600조원이 들어간다고 추산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삼성전자는 최대 360조원 규모의 투자가 진행 중인 상태에서 호남 전공정 투자까지 얹히면, 단기간에 차입 규모가 누적될 수 있습니다. 다운사이클 진입 시 이 부담은 기업 대차대조표에 그대로 전가될 위험이 있습니다.

재무 부담은 곧 고정비와 가동률에 대한 복잡한 계산 문제로 이어집니다. 용인 클러스터의 가동조차 본격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호남에 전공정 팹을 추가하면, 두 거점의 감가상각비와 인건비가 동시에 누적됩니다. 반도체는 변동비보다 고정비 비중이 압도적으로 큰 산업이라, 업황이 꺾이는 시점에 이 고정비 부담이 기업에 먼저 청구서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단순 계산으로도 메모리 팹(Fab) 한 개의 건설비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업계에서는 최근 반도체 팹 1기 건설 비용이 최소 6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모두 호남에 전공정 설비를 짓는다면 투자 규모가 500조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이 기준으로 단순 계산하면, 호남에 팹 1기만 들어서도 가동 여부와 무관하게 매년 6조원(10년 상각 기준)에 달하는 감가상각비가 새로 생기는 셈입니다.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감도./SK하이닉스 제공

이미 용인·청주에 수십조원을 쓰고 있는 와중에 호남에 이만한 팹이 하나 더 생기면 이 고정비는 그대로 더해집니다. 공장 가동률을 낮춘다고 해도 줄지 않는 비용이기 때문에 추후 업황이 꺾여 생산을 줄일수록 단위당 원가가 오히려 치솟는 역설은 호남 팹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게다가 이는 최소한의 비용만 반영한 단순 가정치로, 실제 상각 기간·방식은 회사별로 다르고 장비 노후화·교체 비용까지 더하면 부담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 과잉설비에 기술력 저하, 다운턴 리스크 등 산재

늘어난 생산능력은 시장에서의 악재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실제 과거 반도체 치킨게임은 무리한 증설로 인한 공급과잉이 메모리 기업간 '배틀 로얄'로 이어진 사례입니다. 용인과 호남 두 클러스터가 동시에 가동되는 시점에 메모리 업황이 꺾여 있다면, 두 회사가 늘린 설비가 자사의 가격 경쟁력을 깎아먹는 자기잠식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과잉 설비로 인한 가격 하락은 회계상 손상·재고평가로 가시화됩니다.

효율성 측면에서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결정이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광주·전남은 반도체 후공정(OSAT) 생태계는 갖출만한 여력이 있다고 평가해도, 전공정에 필요한 소재·부품·장비 협력사 기반은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정부가 정한 입지에서 새로 출발하는 거점의 초기 수율과 생산성이 기존 수도권 팹보다 낮을 가능성이 있고, 이는 재고·원가 비효율이라는 형태로 손익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장기적이면서 눈에 덜 보이는 비용은 기술전환 지연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연구개발·생산기술 인력 상당수는 수도권에 생활 기반을 두고 있어 신규 거점의 인력 확보가 쉽지 않습니다. 용인 클러스터조차 전력망 구축이 일부 지자체의 변전소 설치 동의 문제로 지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호남까지 동시에 추진하면 경영진의 의사결정 역량이 분산될 수 있습니다. 이는 차세대 공정 투자 타이밍을 놓치는 기회비용으로 청구될 수 있습니다.

이미 삼성 안팎에서도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은 "기업의 지속 가능성과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권 논리에 좌우되지 않도록 유의 깊게 지켜볼 것"이라며 반도체 투자가 정치 논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정점을 지나는 시점과 신규 클러스터 가동 시점이 맞물린다면 급격하게 수익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호남 클러스터 추진이 공식화되더라도 실제 가동까지는 10~20년의 장기 시계가 필요합니다. 지금 정부가 내리는 결정의 비용은 결국 다음 경영진, 다운사이클의 기업이 떠안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부의 속도전과 기업의 신중론 사이에서 최종 투자 규모와 일정이 어떻게 조율될지가 향후 관전 포인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