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오랜 업황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공급 과잉과 가격 급락, 감산을 반복해온 전통적인 메모리 사이클이 AI 수요 확대와 장기 공급계약을 기반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는 24일(현지 시각) 열린 2026회계연도 3분기 실적발표를 통해 "전 부문에 걸친 AI 주도 수요와 구조적 공급 제약으로 타이트한 수급 상황이 2027년 이후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생성형 AI와 추론형 AI 확산으로 데이터센터용 D램과 낸드플래시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공급 부족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강력한 수요는 메모리 시장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과거 메모리 산업은 PC와 스마트폰 등 전방 IT 기기의 소비 주기에 따라 업황이 급변하는 천수답 구조였으나, 이제는 빅테크 기업들의 인프라 투자가 시황을 견인하고 있다. 실제로 마이크론은 올해 처음으로 데이터센터향 메모리 비트 기준 총유효시장(TAM)이 전체 메모리 시장의 절반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AI 학습과 추론에 사용되는 서버 한 대에는 기존 서버보다 훨씬 많은 메모리가 필요하다. 여기에 에이전틱 AI 확산과 기존 서버 교체 수요까지 더해지면서 메모리 수요 기반 자체가 과거와 비교해 크게 확대됐다는 평가다.
이러한 견고한 펀더멘털은 기록적인 실적으로 입증됐다. 마이크론은 이번 3분기 매출 414억6000만달러, 주당순이익(EPS) 25.11달러를 기록하며 시장 전망치를 크게 웃도는 어닝 서프라이즈를 달성했다. 가격 상승과 고부가 제품 판매 확대에 힘입어 매출총이익률은 84.9%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다음 분기 가이던스 역시 매출 500억달러, EPS 31달러라는 시장 기대를 뛰어넘는 수치를 제시했다. 이에 뉴욕 증시 시간외 거래에서 주가는 12% 이상 급등했다. 월가에서는 AI발 메모리 수요가 당분간 공급 증가 속도를 웃돌면서 메모리 업황 강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히 새로운 메모리 사이클의 핵심 동력으로 '제품의 특성 변화'를 꼽는다. 과거 D램이 규격이 동일해 공급량에 따라 가격이 폭락과 폭등을 반복하던 '범용 제품(Commodity)'이었다면, AI 시대의 고대역폭메모리(HBM)는 특정 고객사의 칩에 맞춰 설계되는 '맞춤형 전략 자산'에 가깝다. HBM은 일반 D램보다 제조 공정이 복잡하고 첨단 패키징 기술이 필요해 단기간에 생산능력을 늘리기 어렵다. 업계에서는 웨이퍼 생산능력뿐 아니라 첨단 패키징 공정 전반에서 병목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 때문에 주요 메모리 업체들은 HBM 물량 상당수를 이미 수년치 선판매한 상태다.
이처럼 공급이 극도로 제한되다 보니 판매 방식 또한 '선(先) 주문, 후(後) 생산' 형태로 완벽히 변화했다. 과거처럼 제품을 먼저 만들어두고 시장 가격에 맞춰 판매하는 방식이 아니라, 물량을 미리 확보하려는 고객사들과 장기 계약을 맺고 생산에 들어감으로써 실적의 변동성을 제어하는 구조다.
마이크론은 이번 분기 총 16건의 전략적 고객 계약(SCA·Strategic Customer Agreement)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SCA는 기존 장기공급계약(LTA)보다 강한 형태의 다년 계약으로, 고객의 물량 약정과 가격 하한선 등을 포함해 수익 가시성을 높이는 구조다. 이는 회사 전체 D램 물량의 약 20%, 낸드 물량의 약 3분의 1을 대상으로 하는 장기 공급계약이다. 회사는 이를 통해 과거 치킨게임 시절의 실적 변동성을 낮추고 경영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내 업체들도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와 HBM 공급 물량 상당수를 선계약 방식으로 확보한 상태다. 삼성전자 역시 HBM 사업 확대와 함께 주요 AI 고객사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향후 HBM 시장에서 장기 공급계약 비중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AI 수요 확대에 대응하기 위한 투자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마이크론은 이번 회계연도 순 설비투자(CapEx) 규모를 약 270억달러(약41조6700억원)로 제시했으며, 미국 아이다호와 뉴욕 신규 팹 건설, 싱가포르 첨단 패키징 생산능력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HBM 생산능력 확대와 첨단 패키징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다만 업계 일각에서는 대규모 설비투자에 따른 감가상각비 증가가 장기적으로 수익성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신중론도 나온다. 아울러 AI 서비스의 수익성 논란이나 예상보다 빠른 경쟁사들의 증설이 이뤄질 경우 공급 과잉 국면이 재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AI 시대 메모리가 단순 범용 제품을 넘어 전략 자산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메모리 산업의 사이클 역시 과거의 단기 경기순환 패턴과는 다른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