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가 연일 신고가를 갈아치우는 가운데 업계의 시선은 이미 다음 질문으로 향해 있다. 호황의 끝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 것이냐는 것이다. 이는 메모리 반도체 업계가 수십 년간 사이클을 겪으며 체득한 일종의 학습된 경계심이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주기적으로 호황과 불황의 롤러코스터를 타왔다.
메모리 산업이 극과 극을 오가는 사이클 산업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이 박힌 계기는 1990년대 '치킨게임'이 결정적이었다. PC 보급 열풍으로 잠시 호황을 누렸던 세계 D램 시장은 미국, 일본, 유럽, 한국, 대만 등 10개 이상의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공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가격 폭락을 경험했다. 2010년대 초반까지 독일, 일본 기업들은 하나둘씩 파산하거나 매각됐다. 이후 D램 시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시장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수 과점 체제로 바뀌었다.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가 방아쇠를 당긴 이번 초호황기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에 대해서는 시장조사업체, 투자은행마다 의견이 엇갈리지만, 급격한 불황이 다시 도래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여전히 사이클 산업이지만, 사이클의 본질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특히 PC, 모바일, 서버에 AI로 파생되는 수요처 다변화 효과와 공급업체들의 설비투자 전략 변화로 불황기에도 일정한 수준의 수익성 방어가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 3사 과점·공정전환으로 '공급폭탄' 막는다
16일 카운터포인트 리서치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기준 삼성전자(38%), SK하이닉스(29%), 마이크론(22%) 3사는 전 세계 D램 시장의 90%를 나눠 갖고 있다. 세 기업은 이미 과거 수차례의 불황 사이클을 겪어온 생존자들이다. 2020년 이후 3사는 D램, 낸드플래시 시장에 공급 과잉 신호가 보일 경우 적극적인 감산이나 생산량 조절, 공정 전환 등을 통해 암묵적으로 일정 수준으로 공급가를 통제하고 있다.
설비투자 방식도 달라졌다. 3사 모두 신규 공장을 짓는 대신 기존 팹에서 범용 D램을 HBM(고대역폭메모리)으로, DDR4를 DDR5로 전환하는 등 보수적인 생산능력 확장을 진행 중이다. 신규 팹은 착공 후 2~3년이면 물량 폭탄이 되지만, 공정 전환은 공급량 증가가 제한적인 반면 생산성은 높아진다.
특히 AI 인프라에 핵심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의 등장이 메모리 시장의 기초 체력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특히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경우 전체 D램 생산량의 30~40% 수준을 HBM에 할당하고 있다. 이에 PC, 모바일, 서버에 사용되는 범용 D램 공급이 줄면서 지속적인 가격 상승이 이어지고 있다. 키움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공급자 주도의 공급 부족 사이클'로 규정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현재와 같은 설비투자 기조를 보일 경우 빠듯한 수급 구조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AI 데이터센터 수요와 보수적인 설비투자를 근거로 메모리 공급 부족이 2027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관측했다.
◇ 빅테크 의존이 리스크… "공급 절벽에서 수요 절벽으로"
물론 새로운 위험 요소도 있다. 빅테크에 대한 매출·영업이익 의존도가 지나치게 커졌다는 점이다. 소수 빅테크의 구매 결정 하나가 글로벌 메모리 수급을 좌우하는 구조가 됐다는 얘기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엔비디아에 대한 매출 의존도가 전체의 30%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엔비디아, 브로드컴 등 대형 고객사의 구매량과 공급가격이 실적에 미치는 영향이 앞으로 더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수요처 다변화가 불황기의 타격을 줄일 수 있는 체력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빅테크에 대한 의존도 심화라는 한계를 만들기도 했다"며 "생성형 AI나 에이전틱 AI와 같은 인프라 투자 수혜가 끝나는 시점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미국 빅테크의 투자 필요에 의해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다만 과거와 같은 절벽형 불황이 재현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시장의 중론이다. 올해 하반기부터 범용 메모리 가격은 점진적 하방 압력을 받겠지만, HBM 등 AI 특화 고부가 메모리는 상대적 강세를 유지하는 '분화된 사이클'이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모건스탠리는 "메모리는 AI 인프라의 결정적 병목 자원이 됐으며, 장기공급계약(LTA)이 전통적인 경기 사이클 사업을 안정적인 수익성과 장기 현금흐름을 갖춘 사업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며 "메모리 공급 부족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은 없으며 당분간 이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