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와 엔비디아가 8일 차세대 인공지능(AI) 메모리 공동 개발을 위한 장기 파트너십을 공식화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핵심 파트너라고 공언하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화답하는 형식으로 이뤄진 이번 선언은 양사의 밀착 관계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번 파트너십을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강자인 SK하이닉스의 미래 전략을 가늠할 분수령으로 평가하면서도,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기회와 리스크가 교차하는 복잡한 방정식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SK하이닉스의 경쟁사인 삼성전자, 마이크론이 역사상 최고점인 메모리 반도체 기업의 공급자 우위를 레버리지로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반면 SK하이닉스의 경우 엔비디아와의 장기계약으로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SK텔레콤 해킹 사고로 흔들린 SK그룹의 신뢰 회복과 성장을 위해 SK하이닉스가 메모리 가격 협상 테이블에서 일종의 '디스카운트' 요소를 떠안는 방향으로 협상이 기울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우선 이번 파트너십이 SK하이닉스에 가져다주는 가장 직접적인 수혜는 수요 가시성(visibility) 확보다. HBM을 비롯한 첨단 메모리는 통상 2~3년에 달하는 개발·양산 사이클을 갖는다. 고객사 로드맵과 조기에 연동되지 못하면 수조원 규모의 선행 투자가 허공에 뜨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 황 CEO와 최 회장의 협상으로 SK하이닉스가 상당한 물량을 사실상 선확약 형태로 확보하는 효과를 누리는 셈이다. 여기에 RTX 스파크 PC(퍼스널 AI), 젯슨 토르(피지컬 AI·로보틱스) 등 SK하이닉스가 아직 공략하지 못한 신시장의 입장권을 확보한다는 전략적 의미도 크다.
다만 엔비디아의 로드맵이 삐걱댈 경우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리스크도 있다. 현재 SK하이닉스의 HBM 매출 가운데 엔비디아가 물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인 것으로 업계는 추정한다. 장기 파트너십은 이 같은 쏠림 구조를 더욱 심화시킬 공산이 크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 강화, 빅테크의 자체 AI 칩 개발 가속화, 엔비디아 자체의 업황 둔화 등 외부 변수가 현실화될 경우 SK하이닉스가 받는 충격은 구조적으로 증폭될 수밖에 없다. 특정 고객 의존도가 높은 공급망은 호황기에는 강점이지만, 하강 국면에서는 순식간에 치명적 약점으로 돌변한다.
더 큰 문제는 협상력 약화다. 협상의 구체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두 회사의 공동 개발 체계 아래 SK하이닉스의 기술, 생산 로드맵이 일정 부분 엔비디아의 플랫폼 일정에 종속될 가능성이 높다. 사양 결정, 개발 우선순위, 물량 배분 등 주요 의사결정에서 구조적으로 SK하이닉스의 '을(乙)' 위치가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마이크론과 같은 경쟁사가 엔비디아 외에도 다양한 빅테크 고객군을 레버리지로 삼아 가격 협상력을 강화해 나가는 동안, SK하이닉스의 포트폴리오 다변화 속도는 상대적으로 둔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우려는 삼성전자와의 생산능력(CAPA) 격차를 감안하면 더욱 현실감을 갖는다. 삼성전자는 업계 최대 생산능력과 투자 능력, 유휴 공간 등을 바탕으로 브로드컴, AMD, 오픈AI 등 다양한 고객사를 바탕으로 가격 협상에서 다중 레버리지를 구사할 수 있다. 실제 엔비디아, 브로드컴에 납품하는 삼성전자의 5세대, 6세대 HBM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SK하이닉스는 평택에 넓은 부지를 보유한 삼성전자와 달리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생산능력, 여기에 엔비디아 집중 구조가 맞물리면서 장기 계약이 오히려 가격 협상의 족쇄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기술 종속과 데이터 유출 리스크도 있다. 이번 협약에는 엔비디아의 쿠다-X와'PhysicsNeMo'를 활용한 반도체 시뮬레이션 고도화와, 옴니버스(Omniverse), 오픈USD 기반 디지털 트윈 구축이 포함된다. 제조 혁신의 관점에서는 분명한 진전이지만, 엔비디아 플랫폼을 공정 깊숙이 내재화할수록 향후 이를 걷어내기 어려운 '락인(lock-in)' 구조가 형성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공정 노하우가 엔비디아 소프트웨어 스택과 결합되는 과정에서 민감한 제조 데이터가 파트너사에 노출되는 리스크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한편 SK하이닉스 측은 이 같은 우려에 대해 "엔비디아를 포함한 다양한 글로벌 고객사들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고 생산 역량도 빠르게 확충되고 있다"며 "고객 수요에 유연하고 안정적으로 대응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