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전 11시, 비가 내리는 대만 타이베이 광화상권. ASUS와 기가바이트, MSI, 에이서 등 글로벌 IT 기업들의 대형 간판이 늘어선 거리 사이로 PC 부품 매장과 브랜드 전시장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었다. 상권 중심에 자리한 6층 규모 전자상가 '광화상창(光華商場)' 2층에 들어서자 벽면을 가득 메운 조립 PC 견적표가 눈에 들어왔다.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카드, 메인보드 조합별 가격표 수십 장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고, 소비자들은 매장 직원과 사양을 상담하며 자신만의 PC 견적을 맞추고 있었다.

5일 대만 타이베이 광화상창 2층 조립 PC 매장에서 소비자들이 견적을 상담하고 있다./타이베이=최효정 기자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공간이 있었다. 서울 용산전자상가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국내 조립 PC 문화의 중심지로 군림했던 유통 거점이다. 그러나 가격비교 플랫폼 다나와의 등장과 온라인 쇼핑 확산으로 오프라인 유통 경쟁력은 급속히 약화됐다. 여기에 삼보컴퓨터 등 국내 PC 제조업체들의 쇠퇴와 모바일 시대로의 전환이 맞물리면서 용산은 중심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걸었다.

반면 대만의 광화상권은 명맥을 유지했다. 전자상가가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유통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대만 PC 산업과 함께 성장한 하드웨어 생태계의 일부로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광화상권을 중심으로 성장한 ASUS와 에이서, MSI, 기가바이트 등 토종 PC 기업들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고, 이후 서버 제조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PC 메인보드와 그래픽카드, 냉각장치를 만들던 기업들이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시장에 진출하면서 PC 산업의 축적이 AI 산업으로 이어졌다.

5일 대만 타이베이 광화상권 골목. 상가마다 ASUS 등 PC 매장과 부품 업체 매장이 뒤섞여 있다./타이베이=최효정 기자

광화상권 옆에 위치한 대형 IT 복합몰 '삼창수위생활원구(Syntrend)'는 최신 PC와 게이밍 기기, AI PC를 전시하며 전통적인 부품 상권과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용산이 유통 상권으로 남았다면 광화상권은 제조업 생태계와 함께 진화한 셈이다.

광화상권에서 PC 부품을 판매하는 린종더(24)씨는 "대만 시장이 크지 않지만 PC 수요가 여전히 많다"며 "대만 사람들은 지금도 자신이 원하는 사양에 맞춰 직접 부품을 고르고 PC를 조립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는 "게임용 PC뿐 아니라 AI 개발이나 영상 편집용 고성능 시스템을 찾는 고객도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조립 문화는 단순한 소비 트렌드를 넘어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광화상권에서 만난 황보위(45)씨는 "어릴 때부터 PC를 직접 조립하고 업그레이드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많다"며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IT 업계나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진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아시아 최대 IT·컴퓨팅 전시회 '컴퓨텍스 2026'이 열린 대만 타이베이 난강 전시장이 방문객으로 붐비고 있다./뉴스1

대만 IT 산업의 현주소는 아시아 최대 IT·컴퓨팅 전시회 '컴퓨텍스(COMPUTEX) 2026′에서도 확인됐다. 1981년 컴퓨터와 PC 부품 중심 전시회로 출발한 컴퓨텍스는 이제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액체냉각, 고성능컴퓨팅(HPC) 기술이 중심인 행사로 바뀌었다. 올해 전시장에서는 일반 소비자용 PC보다 AI 서버 랙과 냉각 시스템,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전면에 내세운 부스들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달라진 것은 제품의 크기일 뿐 산업의 뿌리는 같다고 설명한다. AI 서버 역시 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메인보드, 전원장치, 냉각장치 등을 결합한 거대한 컴퓨터다. 과거 PC 조립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력과 공급망이 오늘날 AI 서버 제조 역량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현재 엔비디아 AI 서버 상당수는 폭스콘(훙하이정밀공업), 콴타, 위스트론 등 대만 기업들의 생산라인에서 조립된다. 에이수스와 기가바이트 등 전통의 PC 메인보드 업체들도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그래픽카드와 메인보드, 냉각 부품을 만들던 역량이 AI 인프라 공급망으로 확장된 것이다.

용산과 광화상권의 운명을 가른 것은 유통 환경뿐 아니라 상권이 유통 단계에 머물렀는지, 제조업 생태계와 함께 성장했는지의 차이였다. 과거 PC를 조립하던 대만 하드웨어 산업은 이제 전 세계 AI 서버를 조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