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5월 16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로 귀국하며 노조 파업에 대한 입장을 밝히던 중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사진 뉴스1

2026년 미국 4대 하이퍼스케일러(대규모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 아마존웹서비스(AWS)·마이크로소프트(MS)·알파벳(구글)· 메타플랫폼이 쏟아붓는 7250억달러(약 1064조원) 규모의 인공지능(AI) 투자 붐이 한국 경제에 거대한 'AI 횡재'를 안겨주고 있다. 이로 인한 메모리 반도체(이하 메모리) 품귀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2026년 영업이익 합산액이 600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증권가 전망이 나온다.

블룸버그이코노믹스의 5월 15일(현지 시각)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2026년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17%를 창출하고, 3% 안팎으로 전망되는 GDP 성장률 가운데 2.7%포인트를 견인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두 회사의 향후 1년간(2026년 하반기~2027년 상반기) 법인세 납부액은 2025년 한국 전체 법인세 세수와 맞먹는 80조원에 달하며, 그다음 1년간은 100조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소셜미디어(SNS)에서 AI 초과 세수를 활용한 '국민 배당금' 제도를 주장하면서, AI 횡재를 둘러싼 논쟁이 확산 중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에 앞서 이번 메모리 호황이 과거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이 '고객 주문형 생산'으로 이동하는 AI 시대에는 가격 폭등에도 제조사의 시장 주도권이 과거와 같지 않다. 반도체 생산, 재고 관리, 가격 결정 구조의 변화 양상을 살펴봐야 초과이익의 지속성을 가늠할 수 있다.

메모리價 폭등했는데… 가동률 '뚝'

국가데이터처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2016년 3월 55.3이었던 반도체 제조업 생산능력지수는 2026년 3월 191.5로 3.46배 커졌다. 반면 반도체 생산지수는 같은 기간 57.3에서 161.3으로 2.81배 확대된 데 그쳤다. 팹(fab·공장)과 설비 등 반도체 제조 인프라는 세 배 이상 확대됐지만, 생산 증가 속도는 이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생산능력 대비 실제 생산 수준은 2016년 약 110%에서 최근 1년간 90% 안팎으로 낮아졌다. 과거 호황기에는 잔업·라인 전환을 통해 '정격(capacity)' 생산능력을 웃도는 수준까지 팹을 가동했는데, 최근에는 '설비 풀가동'이 줄어든 모습이다.

이 같은 흐름은 반도체 제조업 가동률에서도 나타난다. 과거 호황기 반도체 팹 가동률은 최고 120%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서버용 최신 D램인 'DDR5 16Gb' 가격이 1년 새 여섯 배 이상 폭등하는 동안 최근 6개월간 가동률은 80~90%대에 머물렀다. 지난 2월 삼성전자의 6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4) 양산이 본격화하면서 비로소 100%를 웃돌았다. 제조사가 무작정 가동률을 끌어올리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5월 16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로 귀국하며 노조 파업에 대한 입장을 밝히던 중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사진 뉴스1

'주문형 생산'으로 바뀌는 반도체 시장

이런 변화는 AI 시대에 달라진 반도체 생산양식 영향이다. AI 연산·추론용 고성능 컴퓨팅(HPC)을 뒷받침할 초미세 공정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반도체 장비 가격과 팹 건설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고 있다. 네덜란드 ASML의 최신형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하이 뉴메리컬 어퍼처(High-NA)' 가격은 대당 4억달러(약 5965억원) 수준이다. 지난 10년간 반도체 생산능력이 급증한 배경에는 초고가 설비 도입에 따른 자본집약도 상승이 자리 잡고 있다.

반도체 제조사의 전략은 고부가가치 제품중심으로 선회하고 있다. 과거 범용 D램과 낸드(NAND)가 시장을 지배하던 시절에는 호황기에 대량생산으로 단가를 낮춰 수요를 창출하는 전략이 통했지만,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에 맞춘 주문형 반도체 생산이 대세가 된 지금에는 범용 메모리를 대량으로 찍어내는 전략만으로는 수익성 확보가 어렵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사활을 건 HBM은 단순 생산량보다 그래픽 처리 장치(GPU)와 패키징 최적화, 고수율 확보, 고객사 인증이 성패를 가른다. AI 시대 경쟁력은 고객사가 설계한 시스템에 최적화된 칩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능력에 달린 셈이다.

AI 시대 시장 지배력, 설계·플랫폼으로

달라진 생산양식은 AI 시대 반도체 산업의 권력이 제조에서 설계·플랫폼으로 이동했음을 시사한다. 과거의 메모리 가격 상승이 제조사의 공급량 조절을 통한 시장 지배력에서 비롯됐다면, 최근의 가격 폭등은 엔비디아 등 빅테크가 주도한 AI 생태계의 폭발적 확장으로 파생한 현상이다. 한국 메모리 제조사는 그 공급망 병목의 핵심 위치에서 초과이익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반도체 시장의 권력 변화는 재고관리에서도 드러난다. 과거 제조사는 호황기에 가동률을 높이고 선제적으로 재고를 쌓아 수요 폭발에 대응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초과 생산에 소극적이다. 2025년 6월 이후 D램 가격이 최대 열 배 급등하는 동안에도 반도체 재고지수는 기준치인 100을 밑돌았다. 고가 장비와 첨단 공정으로 생산하는 HBM 등 맞춤형 메모리는 재고가 막대한 손실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선주문-후생산'이 강화되면서 가동률과 재고가 일정 수준을 넘지 않게 됐다. 주문형 생산이 강화될수록 재고를 통한 공급망의 완충 기능은 약화하고, 병목 현상은 심화한다. 호황기에는 공급 병목이 막대한 초과이익을 낳지만, 투자 사이클이 꺾이면 주문 취소가 재고 손실로 이어져 경제 전체의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될 수 있다.

AI 횡재, 어디에 써야 할까?

AI발 메모리 슈퍼사이클은 한국 경제에 막대한 경제적 횡재를 선사했지만, 경제 전체의 반도체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나타날 위험도 동시에 품고 있다. 현재의 초과이익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장 지배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하이퍼스케일러의 천문학적인 자본 지출이 만든 공급망 병목의 반사이익이다. AI 데이터센터 거품론이 현실화해서 메모리 가격이 급하게 하락하면 지금의 횡재는 'AI 쇼크'로 돌변할 수 있다.

AI 횡재로 인한 초과이익을 어떻게 배분할지는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병목 구조가 만든 횡재를 어디에 재투자할지가 논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소비·자산시장 부양을 위한 소득 보전이 아니라 산업구조 전환과 미래 투자 재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지 않으면 한국 경제는 'AI 네덜란드병' 희생양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AI 호황으로 인한 초과 세수는 포퓰리즘적 분배가 아니라 생산성 낮은 산업의 구조조정 재원으로 투입해야 한다. 동시에 인프라·기술· 인재 투자 종잣돈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번 호황이 메모리 가격 사이클에 의존한 경제구조를 바꿀 마지막 기회"라는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