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 핵심 부품으로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둘러싸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아시아 최대 IT·컴퓨팅 전시회 '컴퓨텍스 2026′에서 주도권 경쟁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차세대 HBM5(8세대 HBM)와 신규 열관리 기술을 공개하며 기술 경쟁력을 강조했고, SK하이닉스는 생산능력 확대와 엔비디아 공급망 우위를 앞세워 시장 지배력을 부각했다.

송재혁 삼성전자 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사장)가 2일(현지시간) 대만 타이베이 컴퓨텍스 전시장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뉴스1

올해 컴퓨텍스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례적으로 전면에 나선 행사이기도 하다. 과거 컴퓨텍스는 엔비디아와 TSMC, 폭스콘 등 대만 기업들의 무대에 가까웠으며, 국내 메모리 반도체 양사 역시 별도 행사를 거의 열지 않았다. 그러나 AI 반도체 시장이 급성장하고 HBM이 엔비디아 공급망의 핵심 부품으로 부상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지난 2일 양사는 나란히 기자들과 만나 각자의 전략을 공개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직접 타이베이를 찾아 글로벌 미디어 간담회에 나섰고, 삼성전자는 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인 송재혁 사장을 앞세워 차세대 기술을 공개하며 맞불을 놨다.

삼성전자가 2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6에서 'HBM5' 모형(목업)을 공개했다./타이베이=최효정 기자

시장의 이목은 삼성전자의 기술력에 쏠렸다. 송 사장은 컴퓨텍스 전시장에서 HBM5 목업(실물 모형)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삼성전자가 차세대 HBM5를 외부에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전자는 HBM5에 자체 파운드리 2나노 공정 기반 베이스 다이(Base Die)를 적용할 계획이다. 동시에 새로운 열관리 기술인 HPB(Heat Path Block)도 공개했다. AI 반도체 성능이 고도화될수록 발열 제어가 최대 과제로 떠오르는 만큼, 차세대 시장의 승부처는 속도뿐만 아니라 열 효율성에 있다는 판단이다.

송 사장은 "AI 시대에는 메모리 단품뿐만 아니라 파운드리와 로직, 패키징을 아우르는 토털 솔루션 경쟁력이 중요하다"며 기술적 자신감을 드러냈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업계 최초로 HBM4 양산을 시작한 데 이어 지난달 HBM4E(7세대 HBM) 샘플 출하에 나섰으며, 이번 행사에서 HBM5 로드맵까지 선제적으로 제시하며 차세대 시장 판도 변화를 예고했다.

2일(현지시간) 대만 타이베이 소재 난강 전시장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6' SK하이닉스 부스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공동취재단

반면 SK하이닉스는 시장 지배력 굳히기에 방점을 찍었다. 최 회장은 같은 날 간담회에서 "메모리 부족 현상이 2030년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기존 전망을 유지한다"며 "향후 5년 안에 웨이퍼 생산능력을 두 배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AI 데이터센터뿐만 아니라 최근 엔비디아가 강조하는 AI PC 시장이 새로운 메모리 수요처가 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최 회장은 "AI 확산으로 더 많은 메모리가 필요해질 것"이라며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투자를 지속하겠다"고 강조했다.

엔비디아와의 견고한 밀월 관계도 과시했다. 최 회장은 전날 '코리아 파트너 나이트'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만난 데 이어 이날 SK하이닉스 부스에서도 조우했다. 황 CEO는 SK하이닉스의 HBM4E 웨이퍼와 차세대 AI 서버용 메모리 모듈인 '소캠2(SOCAMM2)'를 둘러본 뒤 직접 서명을 남기며 두터운 신뢰를 보였다.

현재 HBM 경쟁은 시장을 선점한 SK하이닉스를 삼성전자가 기술로 추격하는 구도다. SK하이닉스는 HBM3·3E 세대부터 엔비디아 공급망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압도적인 양산 경험과 점유율 우위를 확보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차세대 규격에서 판도 변화를 노린다. 올해 업계 최초 HBM4 양산과 HBM4E 샘플 출하에 이어, 이번 컴퓨텍스에서는 HBM5와 2나노 베이스 다이 등 초격차 기술을 대거 투입하며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차세대 플랫폼 '베라 루빈'의 HBM4 공급사로 양사를 모두 공인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의 독주 체제가 HBM4·5 세대까지 이어질지, 아니면 삼성전자가 차세대 기술을 앞세워 주도권을 탈환할지가 향후 시장의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