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로템의 다목적무인차량 HR-셰르파와 다족보행로봇의 모습. / 연합뉴스

'리니지' '배틀그라운드' 등을 만든 국내 게임사들이 한화·포스코·현대로템 등 제조 대기업과 손잡고 '로봇 두뇌' 개발에 나선다. 국내 대기업의 제조 역량과 게임사의 가상 전장 구현·운영 기술을 접목해 현실 세계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피지컬 AI' 시장을 선점한다는 구상이다. 나아가 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국방 AI 분야로 사업을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1일 게임 업계에 따르면 엔씨소프트의 인공지능(AI) 자회사 NC AI는 최근 포스코DX와 로봇의 두뇌 역할을 하는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RFM)'을 개발하기로 했다. NC AI는 시각·언어·행동을 통합 처리하는 VLA 모델 고도화에 주력하고, 포스코DX는 오랜 기간 축적한 자동화 운영 기술을 토대로 디지털 트윈(현실 공간을 가상 공간에 똑같이 구현) 테스트 환경 구축을 맡기로 했다. 낯선 환경에서도 스스로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차세대 산업용 로봇의 두뇌 역할을 맡을 '범용 로봇 AI 모델'을 개발하는 게 목표다.

피지컬 AI는 로봇, 자율주행차, 공장, 물류처럼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AI다. 게임사들이 피지컬 AI 분야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이들이 수년간 인기 게임을 만들고 운영하면서 축적한 3차원(D) 가상환경 구현 역량과 데이터 때문이다.

그동안 기업과 전문가들은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정해진 환경에서 사전에 지정해준 작업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으로 로봇 두뇌를 학습시켜왔다. 그러나 이 방법만 쓰면 로봇이 복잡하고 변화가 많은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로봇이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불확실성에 대응하도록 훈련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현실과 비슷한 가상환경에서 로봇 수천 대가 다양한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고 이를 학습 데이터로 만드는 방식이 각광받고 있다.

게임사들은 게임 속 가상 전장을 구현하며 쌓은 기술력을 기반으로 로봇 학습에 필요한 정교한 시뮬레이션 환경을 구현할 수 있고, 고품질의 합성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지목된다. 국내 게임사들이 강점을 지닌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은 다수의 이용자가 동시에 접속해 활동하는 가상 세계가 펼쳐지고, 물리 법칙이 적용되는 이 환경에서 게임 캐릭터와 무기의 움직임도 실물처럼 정교하게 구현된다.

게임사의 가상현실 구축 역량은 향후 전장 지도와 정찰 영상, 군 통신 정보 등의 정보를 통합 분석해 지휘관의 의사 결정을 지원하는 'AI 참모'와 전장에 투입될 로봇 개발에도 활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크래프톤은 지난 3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협력해 피지컬 AI 기술 공동 연구개발과 합작법인(JV) 설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밖에도 크래프톤은 로보틱스 연구법인 '루도 로보틱스'를 설립하고, 쏘카와 1500억원 규모 자율주행 법인을 세우는 등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꼽은 피지컬 AI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앞서 NC AI는 현대로템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발주한 '피지컬 AI 기반 통합 시뮬레이터 및 모듈형 로봇 시스템' 국책 연구개발 과제의 최종 사업자로도 선정됐다. 미래 전장에서 다종·다중 무인 로봇을 유기적으로 통제하는 유무인 복합 무기체계의 완성도를 높이는 게 이번 사업의 목적이다. NC AI는 이 과제에서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 구현에 필요한 핵심 기술인 '월드 모델' 개발을 주도하게 된다.

로봇이 가상 환경에서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학습했어도 현실 세계의 미세한 변수 앞에서 오작동하는 시뮬레이션-현실 격차(Sim-to-Real Gap)가 피지컬 AI 산업의 최대 과제인데, 월드 모델은 이런 환경 변화를 예측한 뒤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로봇이나 공장에 적용되는 피지컬 AI의 성능은 기업들이 향후 가상의 시뮬레이션과 현실의 물리적 환경 간 격차를 얼마나 좁힐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한상열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연구원은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 밀도와 빠르게 성장하는 방산 산업 등이 강점인 만큼, 이런 강점에 특화된 월드 모델 구축으로 피지컬 AI 시장에서 글로벌 경쟁 우위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