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뉴스1

구글 모회사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수십조원 규모의 팹(반도체 공장) 건설 자금과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구매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쏟아내고 있지만, SK하이닉스는 완곡하게 거절하는 동시에 이 같은 제안을 장기공급계약의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 이미 투자금이 넘치는 가운데 현재 누리고 있는 '슈퍼 공급자(슈퍼乙)' 지위를 흔들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최근 알파벳, MS, 메타 등으로부터 메모리 반도체 설비투자 지원 제안을 받았지만, 경영진은 이를 사실상 실행 가능한 옵션으로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정 빅테크 기업의 자금을 받아 팹을 구축할 경우 독점적 공급 의무를 수반하는 계약 구도가 형성된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특정 고객의 자금으로 생산 라인을 구축하면, 미래 경기 침체로 해당 고객의 수요가 줄더라도 물량을 우선 배정해야 하거나 시장가격 이하로 공급해야 하는 리스크가 생긴다"며 "SK하이닉스 내부에서 빅테크의 투자 유치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부정적으로 보고 경계하고 있다"고 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사실상 삼성전자와 함께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탑재되는 HBM의 대부분을 공급하며, 올해 생산분은 이미 완판 상태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 탑재되는 고사양 HBM을 제대로 양산할 수 있는 업체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외에 거의 없다 보니, 고객사인 빅테크가 오히려 SK하이닉스 앞에서 '을'이 된 역전 구도가 형성돼 있다.

빅테크 기업들의 제안은 크게 두 가지 형태다. 첫째는 SK하이닉스가 경기도 용인에 조성 중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Y1) 건설 비용의 일부를 직접 부담하는 방식이다. SK하이닉스는 1기 팹 건설에만 총 31조원을 투입할 계획이며, 팹이 완공되면 월 35만장 규모의 웨이퍼 생산이 추가돼 전체 캐파가 월 90만장 수준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여기에 네덜란드 ASML의 EUV 노광장비 구매 비용을 지원하는 방안도 논의됐다. ASML의 최신 하이(High)-NA EUV 장비는 대당 약 4억달러(약 5500억원)에 달하는 초고가 장비로, 현세대 EUV 대비 약 2배 비싸다. 1c D램 이상 첨단 메모리 양산에 필수적인 이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SK하이닉스는 이미 약 12조원 규모의 EUV 장비 도입 계획을 확정한 상태다. 빅테크 기업들이 이 비용을 일부 분담하는 방식으로 전용 생산 라인을 사실상 선점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 같은 제안이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배경에는 AI 인프라 투자 경쟁의 극단적 심화가 자리한다. 알파벳, 메타, MS는 최근 실적 발표에서 각각 수백억달러 규모의 AI 인프라 투자 계획을 공개했다. 특히 MS는 올해 자본지출이 1900억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밝혔는데, 칩 등 부품 비용 상승분만 250억달러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메타 역시 "필요한 부품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 공급망 전반에 걸쳐 계약을 체결 중"이라며 공급망 선점 전략을 인정했다.

SK하이닉스는 팹 지분 투자나 장비 공동 소유 같은 구조적 종속은 거부하되, 빅테크의 절박함을 협상 레버리지로 활용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SK하이닉스에 정통한 관계자는 "글로벌 빅테크와 장기공급계약(LTA)을 체결하면서 계약의 구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논의되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는 이를 더 높은 선납금(Prepayment), 5년 이상의 초장기 계약, 가격 하한 보장 조항 등으로 해석한다. 빅테크가 가져오는 자금을 공장 지분이 아닌, 더 유리한 계약 조건으로 환전하겠다는 전략이다.

SK하이닉스의 자신감에는 수치가 뒷받침된다. 올해 1분기 기준 영업이익률은 72%에 달하며, 올해 2월에는 차세대 메모리 생산 확장을 위한 150억달러(약 21조원) 규모의 추가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용인 클러스터 1기 팹은 당초 일정보다 3개월 앞당긴 내년 2월 첫 클린룸 가동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