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업계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3차원(D) 낸드플래시에 생산 역량을 총동원하면서, 2D 낸드플래시 등 레거시(구형) 제품의 공급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키옥시아가 수익성이 낮은 구공정 라인을 잇달아 폐쇄하고, 마이크론마저 범용 제품의 핵심 창구였던 소비자용 사업 철수를 선언하면서 자동차 전장·산업용 장비 등 장기 안정성이 필수적인 시장의 수급 불균형이 악화 일로다.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전경./조선비즈DB

1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3월 화성사업장 12라인의 2D 낸드 생산을 점진적으로 중단하고, 해당 시설을 첨단 1c D램 생산을 위한 '엔드팹(End Fab)'으로 전환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월 8만~10만장 규모의 웨이퍼 생산 능력을 갖췄던 삼성의 마지막 2D 낸드 거점이 문을 닫으면서, 2002년 세계 최초 1Gb 양산으로 시작된 삼성의 2D 낸드 시대는 24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특히 삼성전자의 이번 조치는 과거 시장을 주도했던 MLC(Multi-Level Cell) 낸드 제품의 단종과 맞물려 있다. 삼성은 이미 고객사에 MLC 낸드 단종(EOL)을 통보했으며, 올해 6월 최종 출하를 끝으로 공급을 완전히 중단할 것으로 알려졌다. MLC는 한 셀에 2비트의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식으로, 3비트(TLC)나 4비트(QLC) 방식보다 용량은 작지만 데이터 보존력과 내구성이 뛰어나다. 이 때문에 10년 이상 오작동 없이 버텨야 하는 의료기기나 산업용 로봇 시장에서 '안전판' 역할을 해왔으나,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퇴출을 당하는 형국이다.

키옥시아도 탈(脫)레거시 행보를 공식화했다. 키옥시아는 지난 3월 고객사들에게 2D 낸드 및 3세대 BiCS 플래시 제품에 대한 단계적 철수 계획을 통보했다. 올해 9월 말까지 최종 주문을 받고, 2028년 12월 최종 출하를 완료해 2029년부터는 시장에서 완전히 발을 뺀다는 구상이다. 이미 구형 패키징인 TSOP 제품군의 생산 중단도 병행하고 있어 저용량 낸드 수급은 더욱 타이트해질 전망이다.

마이크론은 기존 고객 수요를 충족하는 수준으로만 MLC 낸드 생산을 유지하는 동시에, 소비자용 브랜드 '크루셜(Crucial)'의 사업 종료를 선언하며 공급난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단순한 브랜드 정리를 넘어 레거시 공정 웨이퍼 생산량을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용 첨단 메모리로 완전히 전환하겠다는 전략적 결단이다. 이에 시장에 공급되던 저용량 범용 낸드 물량이 급격히 사라지며 공급 절벽을 심화시키고 있다.

문제는 주요 업체들의 이탈 속도가 시장의 기술 전환 속도를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올해 전 세계 MLC 낸드 생산 능력이 전년 대비 41.7% 급감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삼성전자·마이크론 등은 구형 설비를 매각하면서도 핵심인 MLC 제조 기술 라이선스 공여는 거부하고 있어, 신규 업체가 시장에 진입하기가 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 일부 SLC·MLC 제품 가격은 한 달 새 두 자릿수 이상 올랐으며, MLC 64Gb 현물 가격은 작년 말(약 6달러) 대비 최대 300% 이상 폭등한 20~28달러 선에 거래되는 등 '패닉 바잉' 현상이 극에 달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용 고부가 메모리로의 자원 쏠림이 실물 산업의 기초인 레거시 메모리 시장을 무너뜨리고 있다"며 "국내 가전·자동차 제조사들의 원가 부담과 공급망 리스크는 내년까지 가중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