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의 '베라 루빈'에 탑재되는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4 제품과 소캠2./SK하이닉스

인공지능(AI) 서비스 확산에 따른 메모리 반도체 수요 폭증이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넘어 저전력 D램(LPDDR)으로 번지고 있다. LPDDR은 스마트폰·태블릿·노트북에 주로 쓰여 '모바일용 D램'으로도 불리는 제품이다. 최근 엔비디아·퀄컴·테슬라 등이 자사 AI 칩 설계에 이를 적극 채택하면서 품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주요 반도체 설계 기업이 올해 출시하는 AI 서버 랙 1대에는 스마트폰 수천대 분량의 LPDDR이 탑재될 전망이다. 이에 스마트폰 제조사들 사이에서 LPDDR을 확보하기 위해 '패닉 바잉'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주요 메모리 기업의 가격 협상력 강화가 HBM에 이어 LPDDR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 AI 랙 1대에 스마트폰 수천대 분량 LPDDR 사용

메모리 3사(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는 최근 AI 칩에 탑재하는 소캠(SOCAMM)2 제품의 양산 출하를 본격화하고 있다. 소캠2는 LPDDR5X를 AI 칩에 특화해 만든 메모리 모듈을 말한다. LPDDR은 1, 2, 3, 4, 4X, 5, 5X 순으로 규격이 발전해 왔는데, 소캠2는 차세대 AI 칩 탑재를 목적으로 가장 최신 모델을 서버 환경에 맞게 변형한 제품이다.

SK하이닉스는 10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6세대(1c) 공정을 기반으로 한 192기가바이트(GB) 소캠2의 양산 출하를 지난 20일 공식화했다. 마이크론도 지난 3월 "소캠2를 대량 생산 중"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삼성전자도 최근 여러 전시 행사에서 소캠2 실물을 전시하면서 고객사 공급을 시사한 상태다.

삼성전자의 '소캠2' 제품 이미지./삼성전자

소캠2의 최대 공급처로는 엔비디아가 꼽힌다. 엔비디아는 차세대 AI 칩 베라 루빈을 올 하반기 출시할 계획이다. 72개 루빈 그래픽처리장치(GPU)와 36개 베라 중앙처리장치(CPU)를 하나의 랙으로 묶어 성능을 끌어올린 게 특징이다.

소캠2는 베라 CPU에 탑재된다. 엔비디아는 베라 CPU당 최대 1.5테라바이트(TB)의 LPDDR5X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192GB 소캠2 8개가 베라 CPU 하나에 들어가는 구조다. 이를 랙 단위로 환산하면 50TB 이상의 LPDDR5X가 탑재되는 셈이다. 이전 세대 제품(블랙월·17TB LPDDR5X)과 비교해 약 3.2배 용량이 커진 것이다.

통상 프리미엄급 스마트폰 1대에 12GB LPDDR5X가 탑재된다. 단순 계산으로 수치만 비교하면 베라 루빈 랙 1대에만 스마트폰 약 4500대 분량의 LPDDR5X가 쓰이게 되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AI 칩이 저전력 D램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며 "LPDDR 품귀 현상은 베라 루빈 출시가 이뤄지는 올 하반기부터 더 뚜렷하게 나타날 전망"이라고 말했다.

테슬라·퀄컴의 차세대 AI 칩에도 LPDDR가 쓰여 품귀 현상은 더욱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테이프아웃(설계 완료 및 공정 투입)을 발표한 차세대 AI 자율주행칩 AI5 하나에 192GB 용량의 LPDDR5X가 탑재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퀄컴 역시 기존 모바일 칩 중심에서 최근 AI 데이터센터 솔루션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LPDDR 수요가 높아졌다. 올해 출시 예정인 추론 특화 AI200 카드당 768GB LPDDR을 지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가 최근 방한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 경영진과 회동한 것도 LPDDR의 수급 불안정이 심화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SK하이닉스 소캠2 192GB 제품./SK하이닉스

◇ 스마트폰에 AI 칩까지 수요 '폭증'… 계약 가격 고공행진

메모리 3사가 수익성이 높은 AI 칩 제조사에 LPDDR 공급을 우선하면서 스마트폰 업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최근 이뤄진 삼성전자와 애플의 12GB LPDDR5X 공급 계약 협상이 이런 현상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최근 아이폰18 시리즈에 쓰이는 LPDDR5X의 가격과 초기 공급량을 정하는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가 기존 대비 가격을 2배 정도 올려 제시했음에도 애플이 이를 수용했다는 후문이다. 12GB LPDDR5X의 개당 가격이 작년 초 30달러대에서 올해 초 70달러(약 10만원) 수준으로 올랐는데, 애플이 이런 가격 인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기존 스마트폰에 더해 AI 칩 수요까지 더해지자 LPDDR 가격도 빠르게 오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LPDDR4X와 LPDDR5X의 올 1분기 계약 가격이 직전 분기 대비 약 90% 급등한 것으로 추정하며 "역사상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LPDDR의 가격 상승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에도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팹리스 업체 고위 관계자는 "현재 LPDDR5X 1개를 구매하는 값으로 작년에는 16개를 살 수 있었다"며 "이런 가격 인상을 부담해도 시중에 풀리는 물량이 없어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마이크론의'소캠2' 제품 이미지./마이크론

소캠2가 AI 시장에서 수요가 급증한 배경으로는 갈수록 높아지는 성능 향상이 꼽힌다. HBM과 더블데이터레이트(DDR)5 레지스터드 듀얼인라인메모리모듈(RDIMM)을 배치하는 기존 AI 칩 구성으로는 성능·전력·폼팩터 요구를 모두 충족하기 어려워졌다. 이를 LPDDR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GPU 패키지에 붙는 HBM은 초고대역폭을 제공하지만, 용량·비용·발열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DDR5 RDIMM은 용량은 크지만 대역폭·전력 효율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구조적 제약을 갖고 있다.

소캠은 LPDDR 다이를 여러 개 적층·실장한 모듈을 패키지 근처에 고밀도로 배치하는 구조다. 기존 LPDDR이 메인보드에 직접 납땜(온보드)되는 방식이었던 것과 달리 고대역폭·저전력을 유지하면서도 탈부착·교체가 가능하다. HBM보다는 시스템 메모리에 가깝지만, 대역폭·레이턴시 측면에서 RDIMM보다 GPU·CPU에 훨씬 가깝게 붙어 '중간 계층'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AI 모델이 커지고 파라미터 수의 급증으로 HBM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용량·전력 제약을 소캠이 완충해 주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미래 먹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HBM과 시스템 메모리 사이에 존재하는 성능·전력·폼팩터 간극을 메워 줄 새로운 계층으로 소캠2가 부각되면서 채택 비중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