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팀 쿡 최고경영자(CEO) 15년 체제를 마무리하고 '엔지니어 CEO' 카드를 꺼내 들었다. 사상 최대 실적에도 생성형 인공지능(AI) 전환 속도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이어지자, 공급망 관리와 수익성 방어에 강점을 보여온 팀 쿡 대신 아이폰과 맥 개발을 이끈 존 터너스를 차기 CEO로 낙점했다. 다음 승부처를 하드웨어와 사용자 경험에서 찾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 15년 팀 쿡 체제 끝낸 애플… 다음 시대 겨냥한 세대교체
애플은 20일(현지시각) 쿡이 오는 9월 1일부로 CEO 자리에서 물러나고, 터너스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수석부사장이 새 CEO를 맡는다고 밝혔다. 다만 쿡은 회사를 완전히 떠나는 대신 이사회 집행의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애플은 이번 인사가 이사회 만장일치로 승인된 장기 승계 계획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표면적으로는 '퇴진'이지만, 성격은 경질이나 비상 대응과는 거리가 멀다. 쿡은 2011년 고 스티브 잡스 애플 공동창업자의 뒤를 이어 애플을 이끌며 회사 가치를 20배 가까이 키웠다. 애플은 지난해 4162억달러(약 612조원)의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고, 여전히 막강한 현금 창출력을 유지하고 있다. 실적만 놓고 보면 수장을 급히 바꿔야 할 기업의 모습은 아니다. 업계는 이번 인사를 흔들리는 회사를 수습하기 위한 카드라기보다, 다음 시대를 겨냥한 선제적 세대교체로 해석한다.
◇ 공급망에서 AI로 애플 핵심 축 변화
애플이 지금 CEO 교체에 나선 배경에는 결국 AI가 있다. 애플은 지난해 '애플 인텔리전스'를 내세워 생성형 AI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시장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더 개인화된 시리와 앱 안팎을 넘나드는 작업 수행 기능의 출시가 2026년으로 밀리면서, AI 전환 속도가 기대보다 더디다는 평가를 자초했다. 애플이 오랫동안 '늦더라도 완성도 높은 제품'을 내놓는 방식으로 시장을 설득해 왔지만, 생성형 AI 국면에서는 그 시간차 자체가 약점으로 읽히기 시작한 셈이다.
이 시점에서 후임이 터너스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터너스는 2001년 애플에 합류해 제품 설계팀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이후 아이폰·아이패드·맥·애플워치·에어팟 등 주요 제품 하드웨어 개발을 이끈 인물이다. 최근에는 애플의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전반을 총괄하며 신제품 설계와 완성도를 책임져 왔다. 팀 쿡이 공급망과 운영, 수익성 관리에 강한 경영자였다면 터너스는 제품과 엔지니어링 색채가 훨씬 짙은 인물로 평가된다.
애플이 그를 전면에 세운 것은 다음 성장동력을 다시 제품에서 찾겠다는 뜻에 가깝다. AI 시대 경쟁은 단순히 더 큰 모델을 먼저 내놓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칩과 기기, 운영체제, 서비스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맞물리느냐가 실제 소비자 경험을 가른다. 업계 한 관계자는 "애플은 오픈AI나 구글처럼 모델 경쟁 그 자체로 정면 승부하기보다, 자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통합한 완성형 경험으로 차별화하겠다는 방향을 이번 인사를 통해 다시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 "AI를 애플답게 만들어야" 터너스 체제의 과제
문제는 이제부터다. 쿡 체제의 애플이 보여준 강점은 효율과 수익성이었다. 터너스 체제의 애플은 기존의 효율과 수익성 만으로는 평가받기 어렵다. 지금 시장은 애플이 AI를 '탑재한 회사'인지보다, AI를 애플다운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회사'인지 묻고 있다. 시리 지연으로 흔들린 신뢰를 회복하고, 아이폰 이후의 새로운 제품 서사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스마트폰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애플은 비전 프로, 웨어러블, 서비스, 차세대 디바이스를 통해 새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 터너스는 단순히 하드웨어를 잘 만드는 엔지니어를 넘어, AI 시대의 새 제품군이 어떤 사용자 경험과 수익 모델로 이어질지까지 보여줘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김용석 가천대 석좌교수는 "잡스가 제품으로 애플의 시대를 열고, 쿡이 운영으로 애플의 제국을 키웠다면, 터너스는 AI 시대에도 애플이 다시 한 번 '제품으로 말하는 회사'임을 증명해야 한다"며 "아이폰의 성공을 반복하기는 어렵지만, 시장은 최소한 애플이 다음 10년의 주력 플랫폼을 무엇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은 제시하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