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추진 중인 '디지털 네트워크 법안(DNA)'을 두고 규제 단순화보다는 오히려 복잡성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다만 네트워크를 인공지능(AI) 시대 핵심 공급망으로 재정의하려는 전략적 시도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적지 않다는 분석이 나왔다.
조대근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는 15일 서울 서초구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KTOA) 사옥에서 열린 '제8회 통신산업 인사이트 세미나'에서 'EU DNA의 주요 정책과 시사점'을 주제로 발표하며 이같이 밝혔다.
조 교수는 DNA를 EU가 추진하는 차세대 통신·연결성 규제 체계 개편안으로 규정했다. 그는 "EU DNA에는 유럽 전역의 네트워크 규칙을 손질해 내부 시장을 강화하고 투자 여건을 개선하는 한편 AI 시대에 필요한 연결 인프라의 독자성과 회복력을 높이려는 취지가 담겼다"면서 "기존 통신 규제를 일부 단순화하면서도 주파수·인허가·차세대 네트워크 요소 전반을 큰 틀에서 다시 설계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다만 조 교수는 법안이 본격 궤도에 오르기 전부터 적지 않은 반발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유럽 집행위원회(EC)는 DNA를 통해 내부 시장 강화, 규제 단순화, 지속 가능한 연결성 확보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제도 설계는 기대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조 교수는 유럽전자통신규제기구(BEREC)의 비판을 주목해야 한다고 봤다. BEREC은 DNA가 명확한 부가가치 없이 불필요한 규제 레이어를 추가하고 있으며, 여러 영역에 걸친 하위 규정이 향후 규제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는 게 조 교수의 설명이다.
권한 배분 문제도 핵심 쟁점으로 제시했다. 조 교수는 "DNA가 각국 규제기관(NRA)의 권한과 재량을 축소하고 이를 EU 차원으로 집중시키려는 방향으로 읽힌다"면서 "성공적인 단일 시장을 위해서는 각 회원국 상황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각국 규제기관의 고유 권한, 즉 보충성이 유지돼야 한다는 점이 BEREC의 문제의식"이라고 했다.
조 교수는 DNA의 실효성 역시 아직 불확실하다고 평가했다. 이 법안은 향후 유럽의회와 유럽각료이사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1~2년 동안 수차례 수정될 가능성이 크고, 이해관계자 요구가 반영되면서 당초 정책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오픈 인터넷 규제나 디지털 생태계 협력 같은 민감한 사안을 법안 본문에 직접 담지 않고 BEREC 가이드라인에 위임하는 방식도 혼선을 부를 수 있다고 짚었다. 조 교수는 이런 구조가 시장 참여자와 최종 이용자 모두에게 불확실성을 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일부 회원국의 반발, 미국과의 통상 협상 압박까지 더해져 EU 집행위가 풀어야 할 정치적 부담도 적지 않다고 봤다.
그럼에도 조 교수는 DNA의 전략적 가치 자체는 작지 않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법안이 네트워크를 단순 인프라가 아니라 AI 시대의 핵심 공급망으로 명문화했다는 점에 의미를 뒀다. 연결성, 독자성, 회복력을 통신 정책의 중심에 놓으려는 발상의 전환이라는 것이다.
투자 유도 장치에도 주목했다. 조 교수는 "주파수 면허 기간 확대, 행정 절차 간소화, 전통적인 보편적 서비스 대상 제외 검토 등 시장 참여자의 부담을 덜려는 접근이 DNA 전반에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저궤도 위성, 해저케이블, AI-RAN 같은 차세대 네트워크 요소를 국가 차원에서 통합 관리하려는 의지도 엿보인다"고 덧붙였다.
조 교수는 DNA가 단순한 통신 법안을 넘어 네트워크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함께 다루는 '생태계 정책' 성격을 띠고 있다고도 분석했다. 통신사업자뿐 아니라 플랫폼, 장비, 서비스, 이용자까지 포괄하는 협력과 분쟁 처리 메커니즘을 함께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DNA의 성패가 규제 완화와 예측 가능성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고 봤다. 그는 "제도가 투명하게 설계되지 않으면 유럽의 디지털 야심이 복잡한 규제의 늪에 빠질 수 있다"며 "한국 역시 이런 글로벌 규제 흐름을 참고해 네트워크 투자 촉진을 위한 명확하고 투명한 제도 지원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