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 네트워크는 더 이상 보조 인프라가 아니라 '미션 크리티컬한 핵심 영역(문제가 생기면 회사나 서비스 전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단순히 연결하는 수준을 넘어, 사용자가 영향을 받기 전에 문제를 자율적으로 식별하고 진단·해결하는 '셀프 드라이빙 네트워크'가 시장의 승부처가 될 것이다."
라미 라힘(Rami Rahim) 휴렛팩커드 엔터프라이즈(HPE) 네트워킹 사업부문 총괄 수석부사장은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조선비즈와 만나 AI 시대 네트워크 경쟁력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라힘 부사장은 1994년 AMD에 입사해 주문형반도체(ASIC) 엔지니어로 1년간 일했다. 이후 스탠퍼드대 대학원에 진학해 전기공학 석사를 받았고, 1997년 주니퍼네트웍스에 ASIC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라힘 부사장은 2025년 HPE의 주니퍼네트웍스 인수와 함께 HPE에 합류했으며, 그전까지 10년간 주니퍼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 현재는 HPE 주니퍼(Juniper) 네트워킹과 HPE 아루바(Aruba) 네트워킹을 아우르는 네트워킹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HPE가 인수한 주니퍼네트웍스는 기업·통신사·클라우드 사업자용 네트워크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로, 특히 AI 기반 네트워크 운영과 데이터센터·보안 분야에 강점이 있다. HPE는 주니퍼 인수를 통해 AI·하이브리드 클라우드 시대 네트워크 경쟁력을 강화했다.
라힘 수석부사장은 HPE의 AI 네트워크 전략을 '네트워크를 위한 AI'와 'AI를 위한 네트워크'라는 두 축으로 설명했다. 그는 "하나는 AIOps(AI로 IT 시스템 운영을 자동화하고 장애를 예측·관리하는 기술)를 통해 운영 복잡성을 줄이고 사용자 경험을 끌어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AI 학습·추론 인프라를 위한 데이터센터 네트워크와 라우팅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라며 "HPE는 이 두 기회를 동시에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한 HPE의 차별점은 '셀프 드라이빙 네트워크'다. 라힘 수석부사장은 "이제는 장애가 발생한 뒤 사람이 대응하는 구조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이상 징후를 먼저 감지하고, 원인을 분석한 뒤, 스스로 최적화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단순히 네트워크 관리 도구에 AI를 붙이는 수준이 아니다"라며 "캠퍼스와 브랜치, 데이터센터 전반에서 일관된 자율 운영 경험을 제공하는 AI 네이티브 네트워킹"이라고 말했다.
HPE는 주니퍼 인수 완료 5개월 만인 작년 12월 HPE 아루바 네트워킹과 HPE 주니퍼 네트워킹을 묶은 AI 네이티브 네트워킹 포트폴리오를 공개했다. 라힘 수석부사장은 "주니퍼 통합의 핵심은 조직 결합이 아니라 고객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운영 방식의 진화"라며 "아루바 센트럴과 미스트를 아우르는 공통 AI 운영 경험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AI 시대 네트워크의 중요성은 데이터센터에서 더 선명해진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라힘 수석부사장은 "AI 데이터센터에 수십억달러를 투자해도 네트워크에 지연이나 병목이 생기면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최적 상태로 활용할 수 없다"며 "고성능 컴퓨팅 만으로는 AI 인프라가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AI 팩토리에서는 GPU와 GPU를 잇는 내부 연결, 데이터센터 간 장거리 상호연결, 에지에서 AI 워크로드가 유입되는 온램프, 이를 뒷받침하는 라우팅까지 모두 하나의 설계로 봐야 한다"며 "고성능 네트워크 없이는 GPU 투자 효과도 반감된다"고 했다.
이에 맞춰 HPE는 데이터센터 내 GPU 연결용 고성능 스위치와 장거리 데이터센터 상호연결, 에지 온램프, 라우팅까지 묶어 AI 인프라를 설계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공개한 신형 QFX5250 스위치는 울트라 이더넷 전송에 대응하도록 설계됐다. 라힘 수석부사장은 "AI 워크로드는 지연과 혼잡에 훨씬 더 민감하다"며 "데이터센터 내부뿐 아니라 멀티클라우드와 장거리 분산 클러스터 환경까지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엔비디아와의 협력도 이 전략의 한 축이다. HPE는 지난해 12월 엔비디아와 AI 팩토리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며 HPE 주니퍼 네트워킹 기반의 에지 온램프와 데이터센터 상호연결 기능을 추가했다. 라힘 수석부사장은 "AI는 더 이상 한 곳의 데이터센터 안에만 머무는 워크로드가 아니다"라며 "멀티 클라우드와 분산 클러스터, '에지(Edge) 환경(중앙 클라우드 데이터센터가 아니라, 사용자나 기기 가까운 곳에서 데이터를 처리하는 컴퓨팅 환경)'을 안정적으로 연결해야 실제 고객 환경에서 AI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했다.
이 같은 전략은 실적에도 반영됐다. HPE가 발표한 2026 회계연도 1분기(2025년 11월~2026년 1월) 실적에 따르면 전체 매출은 93억달러(약 13조9054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18% 증가했다. 이 가운데 네트워킹 매출은 27억달러(약 4조370억원)로 151.5% 급증했고, 영업이익률은 23.7%를 기록했다. 캠퍼스·브랜치 매출은 12억달러(약 1조7942억원)로 42%, 데이터센터 네트워킹 매출은 4억4400만달러(약 6639억원)로 382.6%, 보안 매출은 2억5500만달러(약 3813억원)로 114.3% 전년 동기 대비 각각 늘었다.
라힘 수석부사장은 "주니퍼 통합 효과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숫자로 입증되고 있다"며 "고객들은 이제 네트워크를 단순 연결 장비가 아니라 AI 시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 서비스제공자, 클라우드 사업자 모두 운영 효율을 높이는 '네트워크를 위한 AI'와 AI 인프라 자체를 뒷받침하는 'AI를 위한 네트워크' 두 영역에서 동시에 수요가 커지고 있다"고 했다.
HPE는 이런 흐름을 반영해 2026 회계연도(2025년 11월~2026년 10월) 네트워킹 부문 매출 성장률 전망치를 68~73%로 높여 잡았다. 라힘 수석부사장은 "AI 시대 네트워크의 승부는 결국 자율성에 달려 있다"며 "문제가 발생한 뒤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영향을 받기 전에 스스로 식별하고 해결하는 네트워크를 누가 먼저 제대로 구현하느냐가 시장 판도를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