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의 승지원 회동 사진이 재계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두 거물의 뒤편에, 고풍스러운 목재 케이스 안에서 묵직하게 추를 흔드는 괘종시계가 포착됐기 때문입니다.
이 시계는 독일의 100년 전통 브랜드 헤름레(Hermle) 제품으로, 단순한 인테리어 소품을 넘어 삼성의 경영 철학과 제조업 기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장치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1922년 설립된 헤름레는 기계식 시계의 심장인 '무브먼트' 제조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가문으로, 수백 개의 톱니바퀴가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이들의 메커니즘은 정밀 공학의 정수로 통합니다.
기계식 시계는 19~20세기 당대 최고 수준의 정밀 가공 기술이 집약된 산업의 결정체였습니다. 수백 개의 미세 부품이 완벽하게 맞물려 단 1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구조는, 오늘날 나노(nm) 단위의 극한 공정을 다루는 반도체 산업과 기술적 본질에서 궤를 같이합니다.
특히 전 세계 기계식 시계 엔진의 표준을 제시해온 헤름레의 기술력은 규격화와 정교함을 동시에 요구하는 첨단 반도체 웨이퍼 공정과도 맥을 나란히 합니다. 결국 '초정밀 제조'라는 공통된 DNA가 과거의 시계 산업과 현재의 반도체 산업을 관통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발신된 장소가 '선대의 뜻을 계승한다'는 의미의 승지원(承志園)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집무실 겸 영빈관으로 사용하며 글로벌 리더들과 중대한 의사결정을 내렸던 이곳은 삼성 경영 철학의 심장부와 같습니다. 과거 삼성은 공간과 오브제를 통해 기업의 지향점을 세련되게 전달해 온 전례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이건희 회장이 접견실에 배치했던 조선 백자는 티 하나 없는 순백의 미학을 통해 삼성이 추구해야 할 '무결점 품질 경영'을 시각화한 사례로 꼽힙니다. 또한 세계적 건축가들이 참여한 리움미술관 역시 디테일이 곧 기술의 완성이라는 철학을 건축적으로 구현하며 삼성의 격조를 드러내 왔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 장인정신의 정수인 헤름레 시계가 승지원 전면에 배치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품질과 정밀도를 목숨처럼 여기는 삼성의 가치관을 리사 수 CEO에게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동시에, 제조업의 근본인 '장인정신'을 공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힙니다.
이번 회동을 기점으로 양사는 차세대 인공지능(AI) 가속기 '인스팅트 MI455X'에 탑재될 6세대 HBM(HBM4) 공급은 물론, 최첨단 공정을 활용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까지 전방위로 협력을 확대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이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패키징을 아우르는 삼성만의 'AI 칩 통합 솔루션'이 AMD의 미래 로드맵과 맞물리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전망입니다.
결국 100년 전통의 시계가 '축적된 기술의 역사'를 상징한다면, 양사의 만남은 향후 100년의 미래를 좌우할 '기술 동맹'의 서막을 의미합니다. 정교한 부품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정확한 시간을 만들어내듯, 삼성의 초정밀 제조 역량과 AMD의 설계 지배력이 결합한 이번 파트너십이 글로벌 AI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어떤 승부수가 될지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