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론용 인공지능(AI) 스타트업 그록의 제품 이미지./그록 홈페이지

엔비디아가 약 29조원을 들여 '우회 인수'한 인공지능(AI) 칩 스타트업 그록(Groq)이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에 증산을 요청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력 대비 성능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추론용 AI 칩에 대한 수요가 점차 커지고 있는 가운데,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는 그록과 협력을 강화해 수익성 개선에 속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그록은 지난해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에 위탁 생산을 맡겼던 AI 칩 생산량을 웨이퍼 기준 기존 약 9000장에서 약 1만5000장 수준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생산 물량은 AI 추론에 제대로 활용될 수 있을지 파악하는 샘플 칩을 제조하는 수준이었다면, 올해부터는 상용화를 위한 대량 양산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록은 지난해 12월 엔비디아가 약 200억달러(약 29조원)를 들여 '우회 인수'한 것으로 알려진 AI 칩 스타트업이다. 엔비디아는 그록의 경영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비독점적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그록과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조너선 로스 그록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경영진은 라이선스 체결 이후 엔비디아에 합류해 엔비디아 제품에 그록의 칩 설계를 통합하는 작업을 맡게 됐다. 반독점 규제는 피하면서도 핵심 인력은 흡수해 사실상 인수에 준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 엔비디아가 이 같은 전략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AI 모델을 고도화하는 과정은 통상 '학습'과 '추론'으로 나뉜다. 학습은 대량의 데이터로 패턴을 '배우는' 단계라면, 추론은 학습된 모델을 이용해 새로운 데이터에 대한 예측이나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다. 엔비디아와 AMD 등 현재 AI 칩 시장을 장악한 기업은 훈련에 특화된 AI 칩을 양산하는데, 과도한 전력 소모와 비싼 칩 구매 비용으로 인해 AI 모델을 더 효율적으로 구동할 수 있는 추론용 AI 칩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엔비디아가 AI 모델을 훈련하는 데 쓰이는 AI 칩 시장을 장악한 엔비디아가 추론 시장까지 생태계를 확장하기 위해 그록을 우회 인수한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 /삼성전자 제공

그록이 삼성전자에 위탁한 물량이 많지는 않지만,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가 추론용 AI 칩 수주를 위한 초석을 다지기 위해 수주에 적극 뛰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그록뿐만 아니라 국내 추론용 AI 칩 스타트업인 하이퍼엑셀의 프로세서도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가 전량 생산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그록과 하이퍼엑셀의 AI 칩을 모두 4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으로 양산한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가 그록의 AI 칩을 양산하는 데 활용하는 4㎚ 공정은 칩의 성능을 고도화하기 위해 개선된 공정이 대거 적용된다"며 "공정 단가가 높고 4~5㎚ 공정에 대한 수요가 업계에서 가장 큰 만큼 TSMC와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한 레퍼런스 확보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다. 엔비디아도 AI 칩 시장에 뛰어들고, 그록도 생산량을 늘리면서 추론용 AI 칩 시장이 전격 개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고 했다.

한편, 엔비디아가 GTC 2026에서 그록의 AI 칩 설계를 바탕으로 한 추론 특화된 칩을 공개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추론용 AI 칩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기존 AI 칩에 들어갔던 고대역폭메모리(HBM) 대신 정적 램(SRAM)을 탑재하는 그록의 추론용 AI 칩 설계를 엔비디아가 활용해 시장에 공개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HBM 대신 SRAM을 AI 칩에 활용하면 데이터 이동 속도와 전력 효율을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칩의 가격도 낮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