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인공지능(AI)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 리벨리온이 작년에 약 350억원의 연간 매출을 올린 것으로 파악됐다. 전년(103억4917만원) 대비 매출이 약 3.4배 급증하며 사업이 본궤도에 오른 모습이다. 2020년 9월 설립된 리벨리온은 2023년부터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연간 매출이 27억3477만원 수준이었는데, 이를 고려하면 2년 사이 10배 넘는 사업 성장을 이룬 셈이다.
6일 조선비즈 취재를 종합하면 리벨리온은 자사 신경망처리장치(NPU) 1세대 제품인 아톰(ATOM)·아톰맥스(ATOM-Max)를 작년에 수천장 판매했다. 첫 양산품부터 시장 진입에 성공하면서 작년 매출이 전년 대비 약 238% 증가한 350억원 안팎으로 집계됐다. 리벨리온의 1세대 NPU 제품은 SK텔레콤·KT클라우드·LG전자 등에서 AI 서비스를 구동하는 데 쓰이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리벨리온의 2024년 감사보고서에 나타난 연간 매출은 103억4917만원이다. 리벨리온은 사피온코리아와 2024년 12월 1일 합병했는데, 결합 시점을 연초로 설정해 조정한 매출 규모는 156억4400만원이다. 합병으로 늘어난 매출을 고려해도 작년 매출은 전년 대비 2.2배가량 성장했다. 리벨리온 내부 사정에 밝은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리벨리온은 현재 2025년 감사보고서 작성을 위해 결산을 진행 중"이라면서 "최종 결산 후 정확한 수치가 집계되겠지만, 보수적으로 잡아도 작년 매출은 전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했다"고 말했다.
리벨리온은 작년 9월 시리즈C를 마무리하면서 누적 투자금이 약 6500억원으로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기업 가치는 약 2조원으로 인정받았다. 리벨리온은 지난 2024년 국내 첫 NPU 팹리스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등극한 바 있다. 약 1년 만에 다시 기업 가치가 2배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리벨리온의 주요 투자사로 ▲삼성(삼성벤처투자·삼성증권) ▲SK하이닉스 ▲Arm ▲KT ▲SK텔레콤 ▲사우디 아람코 등이 이름을 올리고 있어 '국내 AI 반도체 대표 주자'란 별명도 얻었다.
◇ 올해 2세대 NPU 양산… "韓 반도체 생태계 발전에 기여"
리벨리온 반도체는 AI의 다양한 영역 중에서도 특히 '추론'에 특화돼 있다. 그동안 글로벌 빅테크는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사용해 AI를 '학습'하는 과정에 집중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AI 서비스가 상용 단계에 접어들면서 실제 성능에 영향을 미치는 '추론'이 중요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GPU보다 효율적인 NPU를 사용해 서비스 비용을 낮추려는 시도가 이뤄지는 추세다.
구글이 자체 개발해 자사 AI 추론에 사용하고 있는 7세대 AI 칩 텐서처리장치(TPU)가 대표적 사례다. 챗GPT 개발사 오픈AI도 최근 미국 AI 반도체 스타트업 세레브라스와 100억달러(약 14조7090억원) 규모의 파트너십을 맺고 GPU 대비 15배 빠른 추론 인프라를 구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는 작년 12월 설립 5주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향후 5년은 비(非)엔비디아 중심의 새로운 AI 인프라 체계가 형성되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본다"며 "리벨리온은 이 흐름을 주도하는 선봉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추론 분야에서 엔비디아가 차지하고 있는 시장의 일부를 가져와 성과를 내겠다는 포부다.
리벨리온은 시리즈C를 통해 유치한 투자금을 기반으로 추론 중심으로 재편되는 AI 시장에 맞춰 2세대 NPU인 '리벨-쿼드'(REBEL-Quad)를 개발, 올해 초부터 양산하고 있다. 이미 일부 물량에 대한 공급처를 확정한 상태다. 또 다양한 빅테크와 기술 검증(PoC)을 진행하며 추가 수주 가능성도 키우고 있다. 리벨 쿼드는 추론 영역에서 중요한 '지연 시간'이나 '연산' 등에서 엔비디아 플래그십 GPU(H200) 이상의 성능을 낸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리벨리온은 리벨 쿼드에 반도체 칩 제조의 물리적 한계인 '리티컬 리밋'(Reticle Limit·858㎜²)을 극복하기 위해 '칩렛'(chiplet) 공정을 적용했다. 또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를 탑재해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신성규 리벨리온 최고재무책임자(CFO)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1세대 제품은 중·소형 AI 모델에 적합하고, 2세대 제품은 거대 AI 모델 운용을 타깃으로 한다"며 "1세대 제품 판매로 인한 매출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지속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2세대 제품 양산이 추가되면서 고객사 폭을 넓힐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년 성과를 기반으로 올해 '대한민국 국가대표 팹리스'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했다.
리벨리온의 2세대 AI 칩은 패키징 일부 공정을 제외하면 모두 국내에서 제작되고 있다. 삼성전자의 4나노미터(㎚·10억분의 1m)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정을 사용한다. HBM도 국산을 쓰고 있다. 국내 다른 NPU 팹리스 기업이 대만 TSMC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과 대조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범용 AI 분야는 엔비디아가 사실상 장악을 했는데, 특수 분야에 활용되는 NPU 시장은 아직 기회가 열려 있다"며 "리벨리온은 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기업이라, 단순한 팹리스라기보다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성공을 이끄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개발부터 생산 및 실사용까지 국내에서 모두 이뤄져 엔비디아에 종속되지 않는 자립 경쟁력을 구축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는 중"이라며 "국내 검증 사례를 바탕으로 해외 진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점도 국내 생태계 확장에 긍정적인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업계 일각에서는 리벨리온의 작년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2024년 말 리벨리온은 2025년 연간 매출 목표치로 '1000억원 이상'을 제시하고, 2025년 상반기 기업공개(IPO) 추진이란 로드맵을 제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 목표에 절반도 미치지 못한 성과가 나오면서 IPO가 당초 시장의 기대보다 흥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리벨리온은 현재 삼성증권을 상장 주관사로 선정하고 올해 말~내년 초에 IPO를 진행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리벨리온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그간 시장에 던진 메시지에 비해 실적 성과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다"며 "이런 시각 차이는 IPO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