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로보틱스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삼성·LG그룹의 부품사 실적이 올해 성장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기는 AI 서버 확대에 따른 수요 증가가 메모리 반도체에 이어 적층세라믹콘덴서(MLCC)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실적 성장의 동력으로 꼽힌다. LG이노텍은 로봇 부품 분야로 사업 외연을 넓히면서 신규 매출원을 마련하는 중이다. 다만 양사 모두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에 따른 시장 불확실성 증가가 성장의 발목을 잡을 '변수'로 부각되고 있다. 매출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올리는 '수출 기업'인 데다, 전쟁으로 인해 스마트폰과 같은 주요 시장이 올해 위축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4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컨센서스(증권사 전망치 평균)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올해 연간 실적으로 매출 12조7204억원, 영업이익 1조3145억원을 올릴 것으로 추정됐다. 증권사들은 삼성전기의 올해 매출이 전년 대비 12.4%, 영업이익은 43.9% 각각 증가할 수 있다고 봤다.
삼성전기는 올 1분기부터 두드러진 실적 성장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 기간 실적 컨센서스는 매출 3조649억원, 영업이익 2878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와 비교해 매출은 11.9%, 영업이익은 43.5% 증가한 수치다.
LG이노텍의 올해 연간 실적 컨센서스는 매출 23조2941억원, 영업이익 8718억원으로 집계됐다. 작년 실적과 비교해 매출은 6.4%, 영업이익은 31.1% 오를 수 있다는 게 증권사들의 분석이다. 올 1분기 실적 역시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5.3% 증가한 5조2451억원, 영업이익은 35.1% 오른 1690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추정됐다.
◇ MLCC 공급 부족 지속… 판가 상승 가시권
삼성전기·LG이노텍의 올해 실적이 전년 대비 성장할 것으로 점쳐지는 배경으로는 'AI 시장 활성화'가 꼽힌다. AI 서비스가 확산하면서 이를 동작하는 데 필요한 부품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사 모두 올해 플립칩-볼 그리드 어레이(FC-BGA)와 같은 고밀도 AI용 반도체 기판 사업 영역이 큰 성장을 이룰 것이라는 게 증권사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양사의 주력 제품 역시 AI 시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삼성전기가 생산하는 MLCC가 대표적 사례다. MLCC는 전기를 저장·공급하고 불필요한 신호(노이즈)를 제거하는 부품이다. 스마트폰·AI 서버는 물론 전기차 등 전기 회로를 사용하는 대다수 제품에 들어가 '전자 산업의 쌀'이라고도 불린다. AI 서버 사용량이 많아지면서 고용량·초소형이면서 고온·고압에 견디는 고품질 MLCC 수요도 덩달아 증가하는 추세다.
AI 서버용 MLCC 시장은 삼성전기와 일본 무라타가 사실상 양분하고 있다. 양사 모두 관련 생산 라인 가동률을 90% 안팎으로 유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시장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판가 상승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양사가 수익성이 높은 AI 서버용 MLCC에 생산을 집중하면서, 범용 제품 공급이 제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유통망에서는 현재 MLCC 가격이 작년 11월 대비 10~20% 올랐다. 통상 유통망 가격은 제조사 가격 정책의 선행 지표로 여겨진다. 실제로 무라타는 최근 MLCC 가격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업계에서는 무라타 정책이 나오면 삼성전기도 이에 맞춰 가격을 조절할 것이라고 본다.
고의영 iM증권 연구원은 "서버용과 IT용 MLCC 생산 라인은 상당 부분 겸용되는데, 실수요에 기반한 지속성이 확인된다면 삼성전기·무라타는 라인 운영 전략을 서버 응용처 중심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다"며 "대부분 MLCC 업체는 10% 내외 증설 계획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이상은 엔지니어 확보 문제로 현실성이 낮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무라타가 올 3분기 가격 인상을 단행하고 삼성전기가 뒤이어 인상한다면 관련 이익 상향 여지가 매우 크다"며 "MLCC와 FC-BGA가 같은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고, 수요의 이유도 동일하게 AI인 만큼 재평가의 단초가 되기 좋은 환경"이라고 덧붙였다.
◇ 카메라모듈 역량 기반으로 로봇 시장 '정조준'
LG이노텍은 피지컬 AI(인공지능이 로봇·기기에 탑재되면서 물리 공간을 인지하고 스스로 판단) 시장 활성화에 맞춰 신규 매출원 마련에 집중하고 있다. 카메라모듈 제조 역량을 기반으로 로봇 부품 시장에서 성과를 내겠다는 전략이다.
시장에서는 LG이노텍이 현대자동차그룹의 로봇 기업 보스턴다이내믹스와 로봇용 '비전 센싱 시스템'을 공동 개발 중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보스턴다이내믹스가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 양산에 돌입하면, 이에 맞춰 LG이노텍 실적도 개선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LG이노텍이 북미 대형 고객사에 휴머노이드용 카메라모듈을 공급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이라는 점도 실적 개선 기대감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이 밖에도 최근 유럽 완성차 업체에 공급하기 위한 라이다 카메라의 양산에 돌입한 점도 실적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된다.
LG이노텍은 최고기술책임자(CTO) 산하에 로보틱스 태스크(task) 조직을 꾸리고 로봇용 부품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비전 센싱을 시작으로 액추에이터·모터·촉각 센서 등 피지컬 AI 부품 전반으로 사업 영역을 넓힐 방침이다. 문혁수 LG이노텍 사장은 올해 초 열린 'CES 2026'에서 기자들과 만나 "광학 원천 기술을 기반으로 한 미래 신사업에서도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로봇용 센싱 부품 사업은 올해부터 양산이 시작됐고, 매출 규모는 수백억원 단위"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삼성전기·LG이노텍 모두 최근 중동 지역 무력 충돌로 세계 시장 불확실성이 커진 점은 실적 성장의 걸림돌로 꼽힌다. 양사 모두 3분기 누적 매출 중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96%에 달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세계 석유 공급의 약 20%를 차지하는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됐다. 유가 상승은 물론 물류 부담·소비 감소 등이 이어져 실적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삼성전기·LG이노텍 제품의 주요 공급처인 스마트폰 시장이 이번 전쟁으로 급격히 위축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올해 스마트폰 출하량이 작년보다 12% 줄어든 11억대에 그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2013년 이후 가장 작은 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장조사업체 연구원은 "삼성전기·LG이노텍 모두 중동 지역에 생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지 않아 직접적·단기적 영향은 제한적"이라면서도 "사태가 장기화하면 수출 기업 모두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