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7일 구글의 1대5000 축척 고정밀 지도 데이터 국외 반출을 조건부로 허가하면서, 20년 가까이 이어진 '지도 갈등'이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그동안 북한을 제외한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제공되던 구글 지도 핵심 기능이 한국에서도 구현되면서, 국내 위치기반 서비스 산업이 글로벌 경쟁 체제로 들어서게 됐다.
1대5000 축척 지도는 실제 거리 50m를 지도상 1cm로 표현한 고정밀 데이터다. 단순한 지도 표시를 넘어 길찾기, 대중교통 안내, 상점·리뷰 정보 연동, 모빌리티 경로 최적화 등 고도화된 위치 기반 서비스의 기반 인프라로 활용된다. 그동안 구글은 정부 보안 심사를 통과한 제한적 데이터를 활용해 기본 표시 서비스만 제공해왔고, 이로 인해 한국은 사실상 '구글 지도 예외 국가'로 분류돼 왔다.
이번 허가로 구글은 한국에서도 글로벌과 동일한 수준의 지도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됐다. 외국인 관광객 입장에서는 익숙한 플랫폼을 통해 길찾기와 교통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되고, 국내 스타트업과 글로벌 기업 역시 구글 지도 API(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 확장이 가능해진다. 모빌리티, 물류, 배달, 여행 플랫폼 등 지도 데이터를 핵심 인프라로 삼는 산업 전반에 파급 효과가 예상된다.
구글은 정부의 이번 결정에 감사 인사를 밝혔다. 크리스 터너(Cris Turner) 구글 대외협력 정책 지식 및 정보 부문 부사장은 "한국 정부의 결정을 환영하며, 한국에서 구글 지도의 역량을 선보일 기회를 갖게 돼 기쁘다"며 "정부 및 국내 파트너들과 긴밀히 협력해 구체적인 서비스 구현 방안을 마련하고, 한국 디지털 생태계의 책임 있는 파트너로서 역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자율주행, 스마트시티, 디지털트윈, 공간 인공지능(AI) 등 차세대 산업과의 연계 가능성이 주목된다. 고정밀 공간정보는 단순 내비게이션을 넘어 AI 학습 데이터로도 활용될 수 있는 전략 자산이다. 구글 입장에서는 지도 데이터를 자사 AI 모델과 결합해 서비스 고도화를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한 셈이다.
박승규 창원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는 "지도 데이터 개방은 국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고, 디지털 경제에서 국가 위상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또한 디지털 고립과 국제 경쟁력 약화를 해소하고, 산업·경제적 가치를 확대할 수 있으며,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정책으로 평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관광 산업 측면에서도 변화가 예상된다. 김득갑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교수는 "구글 지도의 고도화된 서비스는 방한 외국인의 여행 편의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관광객 유치에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서울에 편중된 관광 수요를 전국 각지로 분산시켜 지방 관광 경제를 살리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석호 데이트립 대표도 "한국을 찾는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겪었던 가장 큰 불편이 해소됨으로써, 한국은 전 세계 여행객들에게 더욱 매력적이고 접근하기 쉬운 '글로벌 관광 대국'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한다"며 "또한 관광객 유치를 넘어, 이번 결정은 여행·공간 산업 스타트업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을 여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번 결정은 '전면 개방'이 아닌 엄격한 조건부 허가다. 군사·보안시설 가림 처리와 좌표 표시 제한, 국내 서버에서의 데이터 가공, 보안사고 대응 체계 구축, 한국 지도 전담관 상주 등 복수의 안전장치가 부과됐다. 정부는 위반 시 허가를 중단하거나 회수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히며 안보 우려를 최소화했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국내 플랫폼 업계 일각에선 우려가 여전하다. 그동안 네이버와 카카오 등 국내 플랫폼 기업들은 고정밀 지도를 기반으로 길찾기와 상점 정보, 모빌리티 서비스를 키워왔다. 구글이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확대하면 이용자 선택이 달라질 수 있고, 그에 따라 플랫폼 경쟁 구도도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관측이다.
지도 데이터는 단순 서비스 영역을 넘어 '플랫폼 주권'과 직결된 자산이라는 점도 논쟁의 지점이다. 일부 연구에서는 고정밀 지도 반출 이후 해외 기업에 지급하는 API 이용료와 로열티 비용이 연간 수조원대에 이를 수 있으며, 향후 10년 간 누적 비용이 150조원 이상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해외 기업이 국내에서 창출하는 수익 대비 낮은 수준의 법인세를 납부하고 있다는 지적도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다.
국내 플랫폼 업계 관계자는 "구글이 고정밀 지도를 쓰게 되면 한국에서도 광고·상점 정보·모빌리티 서비스까지 한 번에 묶어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지도는 결국 플랫폼 트래픽의 출발점이라 국내 사업자 입장에선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조건부 허가라고는 하지만 실제 관리가 얼마나 엄격하게 이뤄질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