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전력반도체를 둘러싼 정부 전략이 본격화했다. 산업통상부는 최근 '차세대 전력반도체 추진단'을 공식 출범시키고 단장으로 구상모(51) 광운대 전자재료공학과 교수를 선임했다. 전력반도체는 전기차, 국가 전력망,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국방·로봇 등 국가 핵심 인프라 전반에서 전력을 제어·변환하는 필수 부품으로, 정부는 2030년까지 기술 자립률을 현재 10% 수준에서 2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단순 연구개발(R&D) 지원을 넘어 전력반도체를 국가 전략 인프라 차원에서 다루겠다는 정책적 전환으로 해석된다.
전력반도체는 연산을 담당하는 메모리·중앙처리장치(CPU)와 달리 전기의 흐름 자체를 다룬다. 최근에는 기존 실리콘(Si) 기반을 넘어 실리콘카바이드(SiC), 갈륨나이트라이드(GaN) 등 화합물 전력반도체가 핵심 기술로 부상했다. SiC는 고전압·고출력 환경에 강해 전기차 구동계, 초고압 전력망, 고전력 AI 데이터센터에 적합하고, GaN은 고주파·고효율 특성을 바탕으로 충전기와 전원공급장치, 통신 장비 등에 활용된다. AI 확산과 에너지 수요 급증이 맞물리면서 전력반도체는 핵심 전략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달 13일 서울 노원구 광운대에서 만난 구 단장은 전력반도체를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심장'에 비유했다. 전기차를 넘어 국가 전력망, 에너지 고속도로, 고전압 직류 송전(HVDC), AI 데이터센터까지 전력반도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국가 인프라 전체가 멈춘다. 그는 전력반도체에서 말하는 '기술 자립'은 단순 국산화 비율이 아니라, 핵심 인프라에서 국산 전력반도체를 실제로 사용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구 단장은 화합물 전력반도체와 나노소자 분야의 국제적 연구자로, SiC·GaN 기반 파워소자 연구를 선도해 왔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객원연구원과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원(NIST)을 거쳤으며, 2006년 광운대 전자재료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현재 전력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경쟁 구도는 한국에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유럽은 자동차 산업을 기반으로 수십 년간 전력반도체 기술을 축적해 온 데다, 전기차와 산업용 전력 시스템을 중심으로 SiC 상용화를 선도하고 있다. 미국 역시 AI 데이터센터와 국방 수요를 축으로 고신뢰·고성능 전력반도체를 전략 자산으로 관리하며 기술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해 온 산업 구조 탓에 전력반도체에서는 후발 주자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중국이 대규모 투자와 물량 공세를 앞세워 SiC·GaN 소재와 디바이스 전반에서 빠르게 추격하고 있어, 기술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추진단의 가장 큰 특징은 '수요 중심' 접근이다. 기존 반도체 정책이 기술 개발 이후 활용처를 찾는 방식이었다면, 추진단은 전기차·전력망·AI 데이터센터·국방 등 수요 산업의 기획 단계부터 필요한 성능과 사양을 정의하는 구조를 지향한다. 국내 수요처들이 이미 안정적으로 사용 중인 외국산 부품을 굳이 대체할 유인이 없었던 현실을 정책적으로 해소하겠다는 취지다. 구 단장은 이를 '선수요·후개발'로 요약하며, 공공 인프라와 민간 수요를 동시에 연결하는 것이 추진단 체제의 차별점이라고 설명했다.
추진단은 올해 상반기까지 전력반도체 기술개발 로드맵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수요 산업별 요구 성능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재·공정·설계·파운드리 전반에 걸친 중장기 R&D 방향을 설정한다. 하반기에는 대형 연구개발 과제 기획과 제도화 논의가 이어질 예정이다. 관련법 보완과 제도 개선을 통해 전력망, 데이터센터, 무기체계 등 공공 영역에서 국산 전력반도체가 실제로 적용되게 하는 방안도 검토된다. 인력 양성에도 집중한다. 다음은 구 단장과의 일문일답
―왜 지금 '전력반도체'인가. 정부가 이 시점에 추진단까지 꾸린 배경은.
"전력반도체는 단순히 전기차용 부품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전기차를 넘어 국가 전력망, 에너지 고속도로, 고전압 직류 송전(HVDC), AI 데이터센터까지 전력반도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인프라 전체가 멈춘다. AI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전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제어하고 공급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이 됐다. 전력반도체는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심장과 혈관, 근육에 해당하는 반도체다. 이걸 외부에 의존하는 구조는 에너지 주권, 기술 주권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전력반도체에서 말하는 '기술 자립'과 '주권'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나.
"전력반도체 자립을 국산화 비율 몇 퍼센트로만 보는 건 위험하다. 중요한 건 실제로 쓰이느냐다. 전기차뿐 아니라 국가 전력망, HVDC, AI 데이터센터 같은 핵심 인프라에서 국산 전력반도체를 적용하고, 장기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어야 자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순히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국가 인프라 안에서 작동하는 기술이 기준이 돼야 한다."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전력반도체는 수요 산업과의 결속이 더 중요하다는 평가가 많다.
"그동안 반도체 정책은 기술을 먼저 개발하고 나서 '어디에 쓰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방식이었다. 추진단은 그 순서를 바꿨다. 전기차, 전력망, AI 데이터센터, 국방 같은 수요 산업의 기획 단계부터 어떤 성능과 사양이 필요한지를 먼저 정의한다. 국내 수요처 입장에서는 이미 안정적으로 쓰고 있는 외국산 부품을 굳이 바꿀 이유가 없었는데, 우리는 그 구조적인 문제를 정책적으로 해소하려는 것이다. '선수요·후개발'이 추진단 체제의 가장 큰 차별점이다."
―추진단이 중점을 두는 수요처는 어디인가.
"전기차도 중요하지만, 구조적으로 더 큰 수요는 전력망과 AI 데이터센터다. AI 데이터센터는 엄청난 전력을 필요로 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고효율·고신뢰 전력반도체가 필수다. 여기에 국방과 로봇, 이른바 피지컬 AI 영역도 중요한 수요처가 될 수밖에 없다. 전력반도체는 특정 산업을 넘어서 국가 인프라 전반과 맞닿아 있다."
―SiC·GaN 전력반도체에서 한국이 가장 취약한 고리는 어디라고 보나.
"한두 지점을 꼽기보다는 공급망 전체를 봐야 한다. 소재·공정·설계·파운드리 전반에 조금씩은 역량이 있지만, 유럽과 미국과는 격차가 있고 중국도 빠르게 따라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소재는 반드시 짚고 가야 한다. 기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외 의존도가 매우 높다. 지금 내재화하지 못하면 향후 산업 자체가 불모지가 될 수 있다."
―공정·파운드리 역량은 어떻게 고도화할 계획인가.
"국내에 공정과 파운드리 역량은 존재한다. 문제는 그 역량이 실제로 많이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이 만들고, 국내 수요처에서 소화되면서 경험이 쌓여야 기술이 고도화된다. 그래서 공공·민간 수요를 함께 강조하는 것이다. 연구개발과 양산, 수요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2030년 기술 자립률 20% 목표는 현실적인가.
"20%라는 숫자 자체가 목표라기보다 반드시 넘어야 할 최소 기준선이다. 지금 수준에서 두 배 이상은 무조건 가야 한다. 삼성전자, SK실트론, DB하이텍, LS, 한국전력 등 핵심 플레이어들과 소통해 보면 전력반도체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형성돼 있다. 다만 특정 기업이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추진단이 필요한 이유다."
―추진단 체제여야만 가능한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연구개발뿐 아니라 제도와 공공 수요까지 함께 본다는 점이다. 전력망, 데이터센터, 무기체계 같은 공공 인프라에서 국산 전력반도체가 실제로 쓰이도록 하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 인력 양성도 마찬가지다. 자급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전력반도체는 시장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인프라와 안보, 그리고 주권의 문제다. AI 확산과 함께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지금이 결정적인 시기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