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선점하며 승승장구해온 SK하이닉스가 6세대 HBM 'HBM4' 시대를 기점으로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학계와 업계 전문가들은 하이닉스가 고수해온 '파운드리 외주 구조'와 '공정 보수주의'가 맞춤형 인공지능(AI) 반도체 시대에는 약점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지난 12일 세계 최초로 HBM4 양산 및 출하를 개시하며, 업계 최고 수준인 최대 13Gbps의 동작 속도를 구현해 주도권 탈환에 나섰습니다.
HBM4부터는 적층된 메모리 다이 못지않게 최하단의 '로직 다이(베이스 다이)' 성능과 설계가 전체 시스템의 컴퓨팅 효율을 좌우하는 구조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이를 메모리가 단순 저장 장치를 넘어 연산 보조 기능까지 수행하는 '메모리의 시스템 반도체화' 현상으로 규정합니다.
SK하이닉스가 로직 다이를 자체 생산하지 않고 TSMC에 맡기는 것은 파운드리 인프라 부재로 인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입니다. 문제는 통제권입니다. SK하이닉스는 TSMC 공정 플랫폼에 설계(DTCO)를 맞춰야 하므로, 메모리와 로직 간 통합 설계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핵심 설계 데이터가 외부 파운드리와 공유되는 구조는 장기적으로 전략적 부담이 될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반면 삼성전자는 메모리, 파운드리, 패키징을 수직 통합한 구조를 통해 전하 이동 경로와 배선 구조를 한 몸처럼 최적화할 수 있습니다.
로직 다이의 파운드리 부재는 D램 공정 선택의 차이로 이어졌습니다. 삼성전자가 자체 파운드리 설계를 바탕으로 한 세대 앞선 1c(6세대) D램을 전격 투입한 반면, 하이닉스는 수율 안정성을 이유로 초기 물량에 기존 1b(5세대) D램을 적용하는 보수적 전략을 택했습니다.
1c 공정은 1b 대비 집적도와 전력 효율이 월등합니다. AI 데이터센터의 최대 화두가 '전력'과 '발열'인 상황에서, 엔비디아가 요구하는 13Gbps급 이상의 초고속을 구현하기에 1b 공정은 물리적 한계에 다다랐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로직 다이 설계 및 방열 구조를 직접 통제하지 못하는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성능을 끌어올릴 경우 발열이 가파르게 증가해 제품 안정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1c 공정은 칩 면적을 줄여 웨이퍼당 생산 가능한 순수 칩 수(Net Die)를 늘릴 수 있어, 향후 수익성 면에서도 SK하이닉스가 원가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HBM4 생산의 핵심인 TSMC의 선단 공정과 첨단 패키징(CoWoS) 캐파는 현재 글로벌 빅테크들이 독점한 상태입니다. SK하이닉스로서는 TSMC의 생산 슬롯 확보 여부에 따라 자사 제품의 공급량이 결정되는 불안정한 처지입니다. 이는 고객 맞춤형 사양 변경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것을 가로막는 요소가 됩니다. 여기에 미·중 갈등 및 대만 해협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TSMC 의존도가 100%인 SK하이닉스의 공급망은 불확실성에 노출됩니다.
SK하이닉스가 HBM3E(5세대 HBM)까지 보여준 수율 경쟁력은 높이 평가받지만, HBM4는 단순 제조가 아닌 '시스템 통합' 경쟁입니다. 파운드리 통제력과 선단 D램 공정 적용 시점이 성능 확장성과 직결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SK하이닉스는 "코어다이에 1bnm, 베이스다이에 TSMC 선단 공정을 적용한 것은 기존 플랫폼을 기반으로 안정적 수율을 확보해 고객 요구에 부합하는 대량 양산 체제를 갖추기 위함으로, 업계 최고 경쟁력을 갖춘 파트너들과 협업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반도체 전문가는 "HBM4부터는 로직 다이에서의 기술력 차이가 벌어지는데, SK하이닉스가 파운드리 의존 구조를 독립시키지 않는 한 삼성과의 경쟁이 점점 더 쉽지 않을 수 있다"며 "TSMC가 모든 일을 제쳐두고 SK하이닉스에만 올인하기는 어려운 만큼, 파운드리와 로직 다이를 자체 개발하며 고스펙 제품을 밀어붙이는 삼성에 비해 취약성을 안고 있는 셈"이라고 분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