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의 '게임 체인저'로 꼽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에서 삼성전자가 반격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6세대 HBM(HBM4)을 양산·출하하기 시작했다고 12일 밝혔다. 그동안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물량을 독식하며 HBM 시장을 이끌어 왔지만, 업계에선 삼성전자의 HBM4가 성능을 앞세워 경쟁의 새로운 변곡점을 만들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

◇ 성능 택한 삼성 vs 안정 추구 하이닉스… 승기 뒤집혔다

이번 승부의 핵심은 개발 초반부터 갈린 '공정 선택'이다.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에 한 세대 앞선 10나노급 6세대(1c) D램을 적용하고, HBM의 두뇌 역할을 맡는 로직 다이에 자체 파운드리 4나노미터(nm) 로직 공정을 결합했다. 메모리와 로직을 한 몸처럼 설계 최적화(DTCO)한 것이 이번 제품의 차별점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검증된 10나노급 5세대(1b) D램을 탑재하고, 로직 다이에는 TSMC 12나노미터(nm) 공정을 활용해 수율과 공정 안정성에 무게를 둔 전략을 택했다.

이 같은 전략의 차이가 HBM4의 핵심 성능인 전송 속도를 갈랐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HBM4에서 달성한 11.7Gbps 속도가 기존 패키징 구조상 한계치에 근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삼성전자는 최대 13Gbps까지 구현 가능한 확장성을 확보했다.

데이터 처리 속도 1.3Gbps의 차이는 AI 연산 환경에서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핀당 속도가 11.7Gbps에서 13Gbps로 올라가면, 스택당 총 대역폭은 약 2.6TB/s에서 최대 3.3TB/s 수준까지 치솟는다. 이는 초거대 AI 모델 학습 시 데이터 병목 현상을 획기적으로 줄여 학습 시간을 수주 단위에서 수십퍼센트 이상 단축할 수 있는 수준의 성능 차이다. 실제 엔비디아가 최근 차세대 플랫폼 요구 스펙을 13Gbps로 상향 조정하면서 삼성의 이 같은 '성능 우위 전략'이 과시를 넘어 시장 내 표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HBM3E(5세대 HBM)에서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최첨단 공정 도입이라는 '공격적 베팅'에 나선 결과, 성능 상한선을 뚫어내는 데 성공했다"면서 "특히 TSMC-SK하이닉스 연합과 달리 공정 리드타임을 단축하고 단일 공정 내 최적화를 이뤄낸 삼성의 '통합 공급망'이 AI 반도체 커스터마이징 시대의 강력한 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말했다.

삼성전자의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 제품 이미지./삼성전자

◇ "관건은 수율 안정화 통한 수익성 확보"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출하를 개시한 만큼 관건은 수율 제고를 통한 수익성 확보라는 분석이 나온다. 1b D램 공정은 이를 적용한 범용 D램과 HBM3E가 그동안 시장에 출하되면서 기술이 상당 부분 성숙됐지만, 1c D램은 삼성전자의 HBM4를 통해 사실상 처음으로 상용화되는 만큼 일각에서는 저조한 수율로 수익성을 확보하는데 난항을 겪을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 바 있다. HBM4는 12개의 D램이 적층되는 만큼 D램 수율이 90%를 밑돌 경우 수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수익성이 악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엔비디아 공급망에 진입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성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첨단 공정을 적용했다"며 "제품 성능에서 우위를 점하더라도 공정이 안정화되지 않을 경우 저조한 수율로 수익성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은 리스크"라고 했다.

삼성전자는 HBM 시장 선점을 위해 2027년 전후로 고객사별 요구에 맞춘 '커스텀(맞춤형) HBM' 수요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고, 파운드리와 메모리를 모두 보유한 강점을 바탕으로 ASIC(주문형 반도체) 설계에 최적화된 맞춤형 로직 다이와 HBM을 한 번에 제안하는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 단순 부품 공급자를 넘어 AI 반도체 설계 단계부터 아키텍처를 짜는 설계 파트너인 '슈퍼 을' 지위를 굳히겠다는 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