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무게중심이 D램에서 낸드플래시로 이동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인프라가 '학습'에서 '추론' 단계로 진입하며 고용량 SSD(eSSD) 수요가 폭증, 낸드플래시가 핵심 전략 자산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가격 급등에 해외 경쟁자들이 점유율 탈환을 위해 파상공세에 나선 가운데, 고대역폭메모리(HBM)에 자원을 집중하며 낸드 증설을 억제해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공급 주도권 상실 우려가 커지고 있다.

11일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낸드플래시 계약 가격은 전 분기 대비 최대 55~60% 급등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당초 예상치였던 30%대를 웃도는 수치로, 최근 D램이 보여준 '수퍼사이클'의 가격 상승 궤적을 낸드가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낸드플래시 가격은 올해 1분기에 가파른 상승폭을 기록할 전망이다./카운터리포트리서치

엔비디아가 차세대 '루빈' 플랫폼에서 채택한 통합 스토리지 관리(ICMS) 전략은 이 같은 흐름에 기름을 부었다. ICMS는 쉽게 말해 '자주 쓰는 데이터를 그래픽처리장치(GPU) 바로 옆에 두는 초고속 창고' 전략이다. 낸드를 단순한 '보관용 창고'가 아니라 연산 효율을 좌우하는 핵심 계층, 이른바 '핫 데이터 레이어(Hot Data Layer)'로 격상시키면서 AI 성능 향상의 필수 요소로 만든 것이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 제공

다만 업계 일각에서는 낸드 시장의 이 같은 '골든 사이클'이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겐 역설적으로 오히려 위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익성이 극대화된 HBM에 자원을 집중하며 낸드 증설을 억제하는 사이, 글로벌 경쟁사들은 점유율 탈환의 기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낸드 부문에서 40~50%대 사상 최고 수준의 마진을 기록하며 이익 극대화 전략을 구사 중이다. 그러나 이는 경쟁사들이 설비 투자를 확대하는 동안 스스로 공급 주도권을 양보하는 위험한 '외줄타기' 전략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국내 기업들은 올 2분기부터 최첨단 낸드 공정 전환 투자를 본격화하며 반격에 나설 방침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과 평택 라인을 중심으로 9세대(V9) 낸드 전환을 서두르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로 양산을 시작한 321단 QLC(4비트 단위 저장) 낸드를 앞세워 고부가 eSSD 시장의 초격차를 공고히 한다는 전략이다.

다만 해외 경쟁사들의 추격도 거세다. 미국 마이크론은 HBM 완판으로 확보한 막대한 현금을 낸드에 과감히 재투자하고 있다. 최근 싱가포르에 약 35조원 규모의 첨단 낸드 공장을 착공한 마이크론은 2028년까지 생산능력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공식화했다. 낸드 특유의 '락인(Lock-in) 효과'를 활용해 글로벌 빅테크 고객사들을 장기 계약으로 묶어두려는 포석이다.

일본 키옥시아와 미국 웨스턴디지털(WD) 연합은 "2026년 낸드 물량 전량 완판"을 선언하며, 332단 10세대 낸드 양산 시점을 연내로 앞당기는 등 기술 주도권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가장 위협적인 변수인 중국 YMTC 역시 이미 270단급 낸드 양산에 성공하며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1년 미만으로 좁혔다. YMTC의 올해 말 글로벌 시장 점유율 15% 달성 목표는 이제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평가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낸드 생태계의 주도권을 미국이나 중국에 내줄 경우, 향후 AI 인프라의 핵심인 데이터 거점 시장에서 한국 반도체의 위상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D램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낸드 첨단 공정 전환에 얼마나 과감히 재투입하느냐가 향후 시장 패권 경쟁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