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이 엔비디아의 차세대 인공지능(AI) 칩 '베라 루빈' 초기 생산 물량에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를 공급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이에 마이크론에 HBM 제조 장비인 TC본더(열압착장비)를 납품하는 한미반도체에도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마이크론은 사실상 '엔비디아용 HBM4 공급'을 전제로 현재 생산 시설을 공격적으로 확대하는 중이다.
다만 반도체 업계 일각에서는 엔비디아가 현재 메모리 3사(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의 HBM4 공급 물량을 완전히 확정한 상태는 아니라 '마이크론 조기 탈락'을 단정할 단계는 아니라는 해석도 나온다. 또 마이크론이 엔비디아에 HBM4를 공급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한미반도체에 영향은 적을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분석 업체 세미애널리시스는 최근 보고서를 내고 엔비디아가 마이크론에 HBM4를 발주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베라 루빈 출시 후 약 12개월간 마이크론이 HBM4를 공급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세미애널리시스는 이에 베라 루빈에 탑재되는 마이크론의 HBM4 점유율을 0%로 하향 조정했다.
세미애널리시스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베라 루빈 HBM4 점유율을 각각 70%와 30%로 제시했다. 앞서 업계에서는 마이크론이 베라 루빈의 점유율을 5~10% 정도 가져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으나, 엔비디아가 HBM4 요구 성능을 최근 상향 조절하면서 판도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엔비디아는 최근 메모리 3사에 HBM4의 핀(데이터 이동 통로) 속도를 11Gbps(초당 기가비트) 이상으로 맞춰달라고 요구했다. 마이크론은 이 조건을 충족했다고 했으나, 세미애널리시스는 "목표 사양에 뒤처져 있다"고 봤다. HBM은 D램을 쌓아 만드는데, 가장 아래층에는 데이터 흐름을 제어하고 전력을 배분하는 '베이스 다이'가 있다. HBM4부터는 직접 연산(Logic) 기능도 수행해 중요도가 더 높아졌다. 업계에서는 마이크론이 베이스 다이 설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엔비디아의 요구 성능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엔비디아가 올 하반기 정식 출시를 목표로 하는 베라 루빈은 현재 판매 중인 AI 칩 '그레이스 블랙웰'(GB)보다 높은 성능을 자랑한다. 중앙처리장치(CPU)인 '베라' 36개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루빈' 72개를 하나로 구성한 게 특징이다. HBM4는 루빈에 탑재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월 CES 2026에서 "베라 루빈은 현재 본격적인 양산 단계에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마이크론 '엔비디아 공급 조기 탈락' 사실이면 한미반도체도 타격
마이크론은 HBM3E(5세대 HBM)의 경우 삼성전자보다 1년 정도 빠르게 엔비디아의 품질 테스트를 통과했다. 그러나 생산 시설 한계로 SK하이닉스 대비 실적 개선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마이크론은 베라 루빈 출시 시점에 맞춰 생산 시설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다.
마이크론은 지난 2024년 8월 디스플레이 업체 AUO의 대만 공장을 인수해 메모리 생산 시설로 전환하고 있다. 작년 1월 착공한 싱가포르 HBM 패키징 공장은 이르면 올해 말부터 양산에 돌입한다. 미국 뉴욕주 오논다가 카운티에는 총 1000억달러(145조6200억원)를 투입해 '메가 팹'을 마련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고, 일본 히로시마 공장도 증설한다고 발표했다. 최근에는 D램 생산량 확대를 목적으로 대만 먀오리현에 있는 반도체 업체 PSMC의 'P5 공장'(P5 팹)을 18억달러(약 2조6500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마이크론은 대규모 생산 시설 확대의 배경으로 'HBM 수요 대응'을 꼽았다. 이에 따라 한미반도체의 TC본더 매출이 오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미반도체는 마이크론의 싱가포르 공장 확대에 맞춰 작년 10월 싱가포르 법인을 설립했다.
한미반도체의 작년 3분기 누적 매출(4936억7100만원) 중 80.94%(3996억2500만원)가 해외에서 나왔는데, 마이크론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에는 SK하이닉스의 TC본더 발주 확대로 연간 매출(5589억1700만원) 중 58.73%(3282억7800만원)가 국내에서 발생했다.
시장에서는 한미반도체의 올해 실적도 마이크론의 생산 시설 확대에 달려 있다고 본다. SK하이닉스의 경우 TC본더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있어 마이크론 의존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고객사로부터 본격적인 생산 주문(HBM4)을 접수한 뒤 이에 맞춰 관련 생산 장비(TC본더)를 발주한다"며 "양산 체제의 최적화나 시험품 생산 단계에도 장비 주문이 들어가지만, 본격적인 발주는 고객사로부터 생산량을 확정받은 뒤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SK하이닉스도 작년 하반기 이후 멈췄던 TC본더 발주를 HBM4 공급이 가시화된 지난달 96억5000만원 규모로 재개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장조사업체 연구원은 "세미애널리시스의 전망이 사실이라면 마이크론 내부에서도 설비 투자액 집행 계획을 재검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라고 했다. 마이크론은 작년 말 실적 발표에서 올해 설비 투자액을 기존 180억달러(약 26조4000억원)에서 200억달러(약 29조3000억원)로 상향 조정했는데, 엔비디아 수주가 지연된다면 이를 대폭 수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반도체 업계에서는 세미애널리시스 보고서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미즈호증권은 "마이크론이 엔비디아의 HBM4 공급망에서 빠질 것이라는 관측은 어리석다"고 했다. 마이크론이 작년 말 실적 발표를 통해 시장에서 제기된 성능 이슈에 대해 반박했고 'HBM4를 포함해 2026년도 HBM 공급분이 완판됐다'고 밝힌 만큼 조기 탈락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마이크론이 실적 발표에서 언급한 HBM4 완판은 엔비디아를 제외한 다른 업체의 주문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마이크론의 HBM4는 성능 면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비해 부족해 엔비디아 공급 규모가 적을 수 있다는 건 지속적으로 나왔던 얘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