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고도화로 로보틱스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가운데, 국내 전자부품 회사들이 로봇을 차기 먹거리로 정조준하면서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 로봇 산업 경쟁력 증진을 위한 중요 요소로 핵심 소재와 부품 국산화가 꼽혀서다.
한국 로봇 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활용 국가'로 평가받지만, 산업 구조 자체는 여전히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용 로봇 설치 밀도는 세계 1위에 올랐지만, 핵심 소재·부품 국산화율은 40%대에 머물러 로봇을 많이 쓸수록 외국산 부품 수입이 함께 늘어나는 구조다. 로봇 산업 성장의 부가가치가 국내 제조업으로 충분히 환류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26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전자부품 회사들은 휴머노이드 로봇용 부품 등울 중장기 성장 기반으로 보고 있다. 완제품 업체보다 수요 변화를 먼저 체감하는 부품사 특성상 AI 고도화로 로봇 수요가 증가하는 것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전기다. 삼성전기는 작년 4분기 연결기준 매출 2조9021억원, 영업이익 2395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6%, 108% 성장했다. 연간 기준으로는 매출 11조3145억원, 영업이익 9133억원으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올렸다. AI 서버용 FC-BGA 기판과 전장·서버용 MLCC(적층세라믹콘덴서) 수요가 실적을 견인했다는 평가다.
삼성전기는 이 같은 부품 경쟁력을 로봇으로 확장하고 있다. 증권가 추정에 따르면 휴머노이드 로봇 한 대에는 MLCC가 약 1만 개, 카메라모듈이 최소 5개 이상 필요하다. 로봇도 AI 서버와 마찬가지로 부품 집약도가 높다. 삼성전기는 MLCC 분야 글로벌 2위, 전장용 MLCC에서는 2025년 기준 글로벌 3위 진입이 예상될 만큼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어 로봇 시대 핵심 부품 공급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다만 MLCC와 기판, 카메라모듈 등 기존 주력 부품만으로는 로봇 산업의 구조적 한계를 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로봇 공급망에서 국산화율이 가장 낮은 영역은 구동부(액추에이터·모터)와 정밀 감속기, 제어기다. 실제로 한국은 로봇 핵심 소재인 영구자석의 약 88.8%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으며, 정밀 감속기와 제어기 역시 일본·중국산 비중이 높다.
이 때문에 삼성전기는 최근 노르웨이 초소형 고성능 전기모터 업체 알바 인더스트리즈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다. 휴머노이드 로봇 손과 관절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는 초소형 모터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행보다. 기존 전자부품 중심의 포트폴리오에서 벗어나, 로봇 구동부라는 취약 영역을 직접 보완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LG이노텍 역시 로봇을 차기 성장축으로 설정하고 대응에 나서고 있다. LG이노텍은 카메라모듈과 센서, 기판 기술을 결합해 로봇용 비전·센싱 부품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 로봇 기업 보스턴 다이내믹스와의 비전 센싱 협업, 수백억원대 규모로 알려진 로봇용 부품 매출은 모바일 의존도가 높은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의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LG이노텍은 자동차 전장용 센서에서 축적한 고신뢰성 기술을 로봇으로 확장하고 있으며, 피규어AI를 고객사로 확보한 데 이어 LG그룹 계열 벤처캐피털을 통한 투자에도 참여했다. 휴머노이드 로봇 선두 주자와의 공급·투자 관계를 동시에 구축하며, 단순 부품 납품을 넘어 플랫폼 확장에 따른 반복 수주 가능성을 노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증권가에서는 LG이노텍의 기판 사업이 2026년 50~60% 성장할 수 있다는 전망과 함께, 로봇 관련 수주가 실적 변동성을 완충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로봇 부품을 AI 이후의 다음 수익 레버리지로 평가한다. 골드만삭스는 2035년 글로벌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 규모를 56조원으로 전망했으며, KB증권은 삼성전기를 '피지컬 AI 시대' IT 부품 업종 내 최선호주로 제시했다. MLCC와 패키징 기판이 2026~2027년 슈퍼사이클에 진입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관건은 국산화율 40%의 벽을 실질적으로 넘을 수 있느냐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최근 관련 보고서에서 "한국 로봇 산업은 다운스트림 수요는 강하지만 업스트림과 미드스트림 경쟁력이 취약한 수평적 성장 구조"라며 "로봇 생산이 늘어날수록 외국산 부품 수입이 확대되는 악순환을 끊지 못하면 산업 경쟁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부품사 주도의 공동 연구개발과 전략적 투자, 패키지형 수출을 통해 공급망 안정화를 병행해야 로봇 산업의 부가가치가 국내에 축적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