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챗GPT

'혁신의 성지'로 불리던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가 거대한 자본 엑소더스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구글을 세운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등 억만장자들이 수십 년간 일궈온 터전을 뒤로 하고, 캘리포니아를 떠나거나 자산 거점을 옮기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보를 재촉하는 결정타는 오는 11월 주민투표에 부쳐질 '2026년 억만장자 세금 법안(2026 Billionaire Tax Act)'입니다. 순자산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 이상의 거부들에게 자산의 5%를 일회성 부유세로 부과하겠다는 파격적인 법안은, 2026년 1월 1일 기준 캘리포니아 거주자에게 소급 적용된다는 조항 때문에 지난해 연말부터 현재까지 대규모 이동을 촉발하고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쪽은 자산과 거주지를 옮기는 이른바 '탈출파'입니다. 구글 공동창업자인 래리 페이지는 최근 플로리다 마이애미 코코넛 그로브에서 불과 일주일 새 총 1억7300만달러(약 2400억원)에 달하는 대저택 두 채를 잇달아 사들이며 거주지 이전을 위한 요건 정리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 언론에 따르면 페이지와 연관된 45개가 넘는 유한책임회사(LLC) 역시 캘리포니아에서 폐업되거나 네바다·플로리다 등 세금 부담이 적은 지역으로 전환됐습니다. 세르게이 브린 역시 자신의 슈퍼요트와 전용기 터미널 등을 관리하던 15개 핵심 법인들을 네바다주로 옮기거나 종료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법안이 통과될 경우 래리 페이지가 부담해야 할 세금이 천문학적일 것이라는 추산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들은 자산 잠식을 피하기 위해 '실용적 단절'을 택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탈출 대신 제도 자체를 막기 위해 싸우는 '투쟁파'의 움직임도 거셉니다. 팔란티어 공동창업자인 피터 틸은 억만장자세 저지를 목표로 한 로비 단체에 300만달러(약 44억원)를 기부하며 전면에 나섰고, 실리콘밸리 거물들을 중심으로 총 7500만달러(약 1100억원) 규모의 반대 기금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캘리포니아를 구하라(Save California)'라는 비공개 채팅방에서 대응 전략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도어대시 공동창업자 앤디 팽은 공개적으로 법안을 비판하며 힘을 보탰습니다. 그는 "차등의결권(Class B) 주식에 과도한 가치를 매겨 세금을 부과하면 창업자가 경영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며 "이 법안은 창업자들을 떠나게 만들거나 회사를 팔게 만드는 덫"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텍사스로 거주지를 옮긴 데이비드 색스 백악관 과학기술자문위원장 역시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민주당은 사회주의 정당이 됐다"며 캘리포니아의 정책 기조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반면 세금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캘리포니아에 남겠다는 '잔류파'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인터뷰에서 "우리는 실리콘밸리를 선택했고, 어떤 세금이 부과되더라도 괜찮다"고 밝히며 이 지역이 제공하는 인재 풀과 기술 생태계의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 CEO 역시 캘리포니아가 제공하는 인적 자본과 네트워크 효과가 세금 부담보다 크다는 입장을 주변에 밝혀왔습니다. 이들은 혁신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감내하는 것이 기업과 창업자의 책임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다만 기업과 인구의 동반 유출은 캘리포니아 경제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미 테슬라, 오라클, 스페이스X, 쉐브론 등 굵직한 기업들이 텍사스와 테네시 등으로 본사를 옮겼으며, 2020년 이후 수백 개 기업이 캘리포니아를 떠났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습니다. 벤처투자자 차마트 팔리하피티야는 이번 부유세 논란과 관련해 "캘리포니아에서 약 1조달러(약 1470조원)의 자본 유출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며, 주 정부의 정책이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일론 머스크가 "캘리포니아는 혁신의 무덤이 됐다"고 일갈한 발언 역시 이런 위기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결국 캘리포니아의 억만장자 부유세 논란은 단순한 세수 확보를 넘어, 자본이 떠나는 '탈출파', 제도를 막기 위해 싸우는 '투쟁파', 그리고 생태계 가치를 이유로 남겠다는 '잔류파'가 정면으로 맞서는 구도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주 정부는 이 세금으로 저소득층 의료와 교육 예산을 확보하겠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상위 1%의 엑소더스가 현실화될 경우 오히려 소득세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오는 11월 주민투표를 앞둔 실리콘밸리는 지금, 각기 다른 선택을 한 억만장자들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시험대에 올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