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게임업체 액티비전 블리자드./AP연합뉴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전성기를 이끌던 핵심 개발자들이 독립해 설립한 게임사와 신작들이 최근 수년간 잇따라 시장의 외면을 받으면서, 업계에서는 '블리자드 출신 실패 징크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 디아블로로 상징되던 이름값과 달리, 독립 이후 선보인 게임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어서다. 이런 가운데 하이브IM에서 사명을 바꾼 드림에이지가 블리자드 출신 핵심 인력들이 만든 본파이어 스튜디오의 신작 '알케론'을 올해 출시할 예정이어서, 이번에는 반전에 성공할 수 있을지 시선이 쏠린다.

◇ 시스템·IP 떼내니 '맨땅에 헤딩'… 구조적 한계 발목

12일 게임업계에 따르면 최근 2~3년간 블리자드 출신 개발자들이 설립한 스튜디오들의 성적표는 냉혹하다. 스타크래프트2·워크래프트3 핵심 개발진이 모여 '차세대 스타크래프트'를 표방했던 프로스트 자이언트의 '스톰게이트'는 2024년 얼리 액세스 이후 그래픽 완성도와 타격감, 콘텐츠 볼륨 논란에 시달리며 스팀 평가가 '복합적'에 머물렀다. 한때 수만명에 달했던 동시 접속자 수는 빠르게 줄었고, 하드코어 RTS(실시간전략게임) 시장이 축소된 현실도 발목을 잡았다.

더욱 충격적인 사례들도 이어졌다. 블리자드와 번지 출신 개발진이 뭉친 파이어워크 스튜디오의 '콘코드'는 출시 약 2주 만에 서비스 종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며 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어 블리자드와 라이엇 출신 베테랑들이 설립한 엘로디 게임즈의 야심작 '시커즈 오브 스카이베일' 역시 MOBA(팀 단위로 거점을 점령하는 온라인 전투 게임)와 배틀로얄(제한된 공간에서 최후의 생존자를 가리는 방식)을 결합한 참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용자 확보에 실패하며 서비스 종료 수순을 밟았다. 넥슨이 퍼블리싱을 맡았던 띠어리크래프트 게임즈의 '슈퍼바이브' 또한 입소문과 기대와 달리 이용자 이탈을 막지 못해 고전하고 있다.

정식 출시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사례도 적지 않다. 실제 2024~2025년 사이 블리자드 출신 개발자들이 설립한 신생 스튜디오 가운데 상당수는 출시 1년을 넘기지 못했거나, 정식 서비스 이전 단계에서 프로젝트를 접었다. 스타크래프트2 밸런스 디자이너 출신 데이비드 킴이 이끈 언캡드 게임즈는 '배틀 에이시스' 프로젝트를 테스트 단계에서 접었고, 디아블로3 총괄 디렉터였던 제이 윌슨이 설립한 가스 자이언트 게임즈는 게임을 제대로 공개하지도 못한 채 스튜디오를 정리했다. 배틀넷 핵심 개발자로 알려진 패트릭 와이어트의 원 모어 게임, 블리자드·에픽게임즈 출신 베테랑들이 참여한 라이트포지 게임즈 역시 개발 중단 또는 사실상 해체 상태에 놓여 있다.

독립의 벽을 넘지 못하고 '친정'으로 회귀하거나 자금난으로 증발한 사례도 있다. 마법 배틀로얄 '스펠브레이크'를 내놨던 프롤레타리아는 흥행 실패 후 블리자드에 피인수되어 지원 조직으로 전락했고, 워크래프트 세계관의 아버지 크리스 멧젠조차 창업했던 워치프 게이밍에서 한계를 느끼고 블리자드로 복귀했다. 600억원대 투자를 받았던 플레이기그 역시 자금난으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나마 하스스톤 디렉터 출신 벤 브로드가 설립한 세컨드 디너의 '마블 스냅'이 유일한 성공 사례로 꼽히지만, 이마저도 블리자드식 대작 개발 공식을 버리고 모바일과 IP 파워에 기댄 결과라는 점에서 '블리자드 DNA의 승리'로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많다.

업계에서는 이런 연쇄적인 부진이 개인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블리자드의 경쟁력은 스타 개발자 개인보다도 수십년간 축적된 QA, 밸런싱, 연출, 세계관 관리 시스템과 막대한 자본, 강력한 IP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과 IP를 떼어낸 상태에서 과거의 기대치를 그대로 가져온 신작들이 시장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고, 5~7년에 달하는 개발 기간 동안 장르 트렌드가 이미 바뀌어버린 경우도 많았다. '블리자드 출신'이라는 간판이 더 이상 흥행을 보장하지 않는 환경이 됐다는 평가다.

◇ 10년 침묵 깬 '알케론'… '이름값' 떼고 '재미'로 증명 필요

이런 상황에서 드림에이지와 본파이어 스튜디오가 준비 중인 '알케론'은 블리자드 출신 신작 가운데 아직 개발이 중단되지 않고 출시 단계에 진입한 몇 안 되는 프로젝트로 꼽힌다. 본파이어 스튜디오는 2016년 블리자드 최고창작책임자(CCO)였던 롭 팔도, 디아블로3 총괄 디렉터 조시 모스케이라, 블리자드 시네마틱을 총괄했던 닉 카펜더가 공동 설립한 스튜디오다. 설립 당시 안드리센 호로위츠와 라이엇 게임즈로부터 2500만달러 투자를 유치하며 기대를 모았지만, 수년간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놓지 못해, 업계에서는 이른바 '베이퍼웨어(실제 출시 여부가 불분명한 개발 중 제품)'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왼쪽부터)제레미 크레이그 본파이어 스튜디오 디렉터·민 킴 본파이어 스튜디오 CSO·롭 팔도 본파이어 스튜디오 CEO, 정우용 드림에이지 대표·서총동 드림에이지 게임사업2실 실장./드림이에지 제공

전환점은 올해 초였다. 본파이어 스튜디오는 다크 판타지 세계관의 탑다운 PvP 게임 '알케론'을 공식 공개했고, 한국에서는 드림에이지가 퍼블리싱을 맡았다. 알케론은 자동 조준이 아닌 자유 조준 기반 전투와 배틀로얄, MOBA 요소를 결합한 구조를 갖췄으며,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한 세계관을 전면에 내세운다. 원형 자기장이 줄어드는 전통적 배틀로얄 방식 대신, 특정 지점에 생성되는 목표를 중심으로 교전이 반복되는 구조를 도입한 점도 차별점이다.

드림에이지로서는 알케론이 단순한 신작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아키텍트: 랜드 오브 엑자일'을 통해 장기 라이브 서비스 운영 가능성을 확인한 이후, 모바일 중심 포트폴리오에서 PC·콘솔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는 두 번째 시험대이기 때문이다. 하이브IM에서 사명을 변경한 이후 퍼블리싱 역량을 전면에 내세운 전략의 성패가 알케론의 흥행 여부에 달려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시장 환경은 녹록지 않다. PvP(이용자 간 대결) 중심 게임은 초기 이용자 풀 형성이 관건이며, 출시 초반 반응이 부진할 경우 회복이 쉽지 않다. 블리자드 출신 신작들이 연달아 고전한 전례 역시 부담 요인이다. 업계에서는 알케론이 과거의 '블리자드 정신적 후속작'을 자처하기보다는, 한국 PC방과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실질적인 이용자 검증과 빠른 피드백 반영에 성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블리자드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기대를 받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배경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 분위기"라며 "이제는 누가 만들었느냐보다 출시 초반에 재미를 증명하느냐가 전부이고, 알케론도 결국 다른 신작들과 똑같이 그 기준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