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의 대다수 기업은 창업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에 의존해 움직였다. 이건희 회장이 이끈 삼성과 정주영 회장이 이끈 현대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지금 이들 기업은 총수 혼자 경영을 책임지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총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각 분야를 관리하고 미래를 위한 최종 의사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키맨(keyman)'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요 기업들의 키맨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전영현 삼성전자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장(부회장)./연합뉴스

2024년 10월 전영현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장(부회장)은 삼성전자 경영진을 대표해 투자자와 주주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실적 부진과 경영상의 실책을 이유로 공개적으로 '반성문'을 전한 것이다. 전 부회장은 삼성전자의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식, 근원적 경쟁력 저하를 일일이 언급하며 재도약을 약속했다. 숫자로 드러난 실적 부진뿐만 아니라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들을 직시하고 해결하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전 부회장이 투자자와 임직원 앞에 나서 경영 실패를 인정하고 쇄신을 다짐한 것은 중대한 함의를 담고 있다. 당시 삼성전자는 최고 의사결정 조직인 사업지원TF(현 사업지원실)를 비롯해 각 사업부의 경쟁력을 의심받는 총체적 난국이었던만큼 여론의 비판도 매서웠다. 전 부회장이 경영진을 대표해 책임을 짊어지고, 대대적 변화를 강조한 것은 그만큼의 권한을 쥐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 돌아온 삼성 반도체의 '돌격대장'

전 부회장은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과 함께 201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삼성 반도체의 전성기를 구가한 공신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권오현 전 회장의 사실상 오른팔 격으로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삼성 반도체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메모리사업부장을 3년간 맡으며 세계 메모리 시장의 압도적 1위를 다지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하지만 권오현 전 회장이 2017년 퇴임하고 전 부회장 역시 삼성SDI로 밀려나면서 한동안 그는 '잊혀진 영웅'이 됐다. 삼성 내부적으로는 권 전 회장이 후임 DS부문장으로 전 부회장을 추천했지만, 결과적으로 김기남 전 회장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전 부회장은 현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해 2인자로 박학규 사업지원실장으로부터 사실상 전권을 부여받아 반도체 사업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전 부회장은 지난 2023년 삼성전자가 신설한 '미래사업기획단'에 다시 합류하며 이 회장으로부터 신임을 받게 됐고, 이후 적자를 내던 삼성 반도체 재건이라는 임무를 받고 2024년 5월 DS부문장을 맡게 됐다. 권오현 전 회장 퇴임 이후 사실상 독립성을 잃었던 DS부문이 고유의 특성에 맞게 다시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전 부회장은 이재용 회장의 측근이라고 분류되는 삼성전자의 재무통, 전략통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정통 엔지니어 출신이기에 소위 '옛 미래전략실' 출신으로 구성된 현재의 삼성 컨트롤타워와는 거리가 멀다. 반도체 사업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중장기적 로드맵 실현을 책임지는 전문경영인이다. 재계에선 이를 두고 과거 이건희 선대 회장과 권오현 전 회장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임파워먼트 시스템(empowerment·권한부여체계)'가 부활했다는 신호라는 해석도 나온다.

◇ 특명받은 전영현, 삼성 반도체 '대수술' 단행

그래픽=손민균

전 부회장은 권오현, 김기남 등 삼성 반도체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부문장들과도 다르다. 삼성 경영자 중에는 이례적으로 LG 반도체 출신이며, 삼성전자에 합류한 건 지난 2000년이다. 엔지니어와 마케팅 역량을 인정받아 14년 만에 삼성 반도체의 핵심인 메모리사업부장에 올랐다. 전 부회장이 메모리사업부장으로 재임하던 당시 삼성전자는 모바일, 서버 D램 분야에서 경쟁사인 SK하이닉스, 마이크론보다 최소 1년 이상 기술적으로 앞서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메모리사업부장 시절 불도저에 비유됐던 그의 경영 스타일은 DS부문장 부임 후 다소 유연해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만 특유의 과감한 결단력과 정면 돌파 스타일의 뚝심은 여전하다. 취임 뒤 사내 게시판에 올린 메시지에서 전 부회장은 부서 간 소통의 벽, 문제를 숨기거나 회피하는 문화, 희망치만 반영된 비현실적 계획 보고를 경쟁력 약화 요인으로 들었다. 내부적으로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쉽게 드러내기 힘든 문제들을 정면으로 돌파한 셈이다.

삼성 반도체의 부문장들이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해 D램, 낸드플래시 등 모든 메모리 분야에서 경쟁사에 뒤처지는 문제를 숨기는 데 급급했다면, 전 부회장은 실책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경쟁력 회복을 강조했다. 그는 취임 후 얼마 안 돼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HBM 시장에서 초기 대응이 늦었던 점을 인정했고, 차세대 공정에서는 이전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결단 중 하나로 꼽히는 건 삼성전자가 서버용 D램 시장에서 뒤처지게 된 배경이며 동시에 HBM 경쟁력 저하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10나노 4세대(1a) D램에 대한 대대적인 재설계 작업이다. D램 공정 개발은 최소 1~2년이 소요되는 장기 프로젝트다. 즉 재설계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리스크가 큰 결단이었지만 전 부회장 체제 하에 삼성 반도체는 일사불란하게 이전의 오류와 실책을 바로잡았다.

◇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톱니바퀴

전 부회장 체제에서 삼성 반도체의 각 사업부는 빠른 회복 탄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전 부회장 체제에서) 삼성 반도체 경영 방식의 핵심은 책임과 권한의 일치를 통한 실행력 강화"라고 설명했다. 전 부회장은 DS부문장과 메모리사업부장을 겸임하고 있는데, 최대 매출처인 D램의 경우 황상준 D램 개발실장에게 강력한 권한을 주고 설계와 엔지니어링, 수율을 개선하는 특명을 내렸다. 신중하고 철저한 엔지니어로 알려진 황 실장은 D램 재설계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분기마다 적자를 기록했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을 다시 일으킨 것도 전 부회장의 성과 중 하나다. 여기엔 삼성 반도체 최고의 '세일즈맨'이자 '협상의 달인'으로 알려진 한진만 사장을 사업부장에 앉히고, 남석우 사장을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선임한 전략이 주효했다. 삼성 반도체를 총괄하는 CTO인 송재혁 사장이 있지만, 파운드리 사업에 별도의 CTO를 둔 것은 파운드리 사업과 메모리 사업의 특수성을 분류하기 위한 묘수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전자 천안캠퍼스를 방문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삼성전자 제공

한진만 사장 체제에서 삼성 파운드리는 지난해 성숙 공정과 첨단 공정 모두 대형 고객사를 잇달아 유치하며 수주 가뭄과 가동률 하락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 성숙 공정 분야에서 인텔, IBM, 닌텐도,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대형 고객사와의 협업을 공고히 했고, 최첨단 공정 분야에선 2나노 수율을 끌어올리며 테슬라와 대규모 계약을 체결한 데 이어 AMD와도 계약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SK하이닉스에 밀렸던 HBM 사업도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품질, 성능 문제가 끊이지 않았던 5세대 HBM(HBM3E) 제품은 8단, 12단 제품 모두 출하량을 대폭 확대하며 SK하이닉스를 바짝 뒤쫓고 있다. 차세대 HBM인 6세대 HBM(HBM4)의 경우 엔비디아, 브로드컴 등 주요 고객사로부터 성능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는 등 성과를 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삼성은 메모리와 파운드리 사업을 동시에 영위하는 세계 유일의 회사"라며 "HBM4에서 삼성은 경쟁사보다 앞선 공정의 D램과 로직 다이를 도입했고 이 과정에서 메모리와 파운드리의 유기적인 협력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전 부회장 체제에서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사상 최초로 분기 영업이익 20조원을 달성했다. 시장 전망치를 크게 웃도는 실적을 기록하며 반도체 슈퍼사이클(초황기)의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국내외 투자은행, 시장조사업체들은 본격적인 호황은 올해부터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 삼성 반도체 차기 리더십 공백 우려

다만 전영현 부회장 체제의 중장기적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남아있다. 전 부회장이 1960년생이라는 고령에 삼성 반도체의 소방수를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뚜렷한 후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부회장이 '포스트 권오현'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면 '포스트 전영현'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얘기다.

인공지능(AI)이 일으킨 광풍으로 세계 반도체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가운데 삼성 반도체의 중장기적 성장 가능성을 위해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나온다. 윤성로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전영현 부회장이) 위기를 수습하고 메모리라는 뿌리를 잘 지켰다면 앞으로 삼성 반도체의 과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통합 솔루션"이라며 "삼성이 보유한 역량을 바탕으로 메모리의 가치를 재정의하고 '기술의 초격차'를 넘어 '전략의 초격차' 또한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