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가 작년 4분기 9년 만에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침체 국면에 들어선 가운데, 시장에서는 올해가 향후 실적 흐름을 가를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글로벌 가전 시장의 성장 둔화와 중국 업체들의 공세로 전통적인 B2C(기업-소비자 간 거래) 사업 환경은 녹록지 않은데, 전장과 냉난방공조(HVAC) 등 B2B(기업 간 거래) 사업을 중심으로 추진해온 체질 전환이 실적으로 이어질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9일 국내외 주요 증권사와 투자은행의 전망치를 종합하면 올해 LG전자의 영업이익은 3조~4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4분기 실적에 반영된 희망퇴직 등 일회성 비용 부담이 해소되는 가운데, 전장과 HVAC 사업을 중심으로 한 B2B 부문의 성장 레버리지가 본격적으로 작동할 것이란 분석이다.
주요 증권가가 제시한 2026년 실적 컨센서스는 매출 93조~95조원, 영업이익 3조5000억~4조원 수준이다.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완만한 회복 흐름을 보일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전장과 HVAC 등 B2B 사업이 영업이익의 70% 이상을 담당하고, 가전 사업은 실적 변동성을 낮추는 방어적 역할을 수행하는 구조가 자리 잡을 것이란 전망이다. 실적 개선이 가전 사업의 반등보다는 사업 구조 변화에 따른 수익원 재편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해석이다.
◇ 가전은 정체… 프리미엄·구독으로 '방어'
생활가전과 TV 등 전통적인 가전 사업에 대해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글로벌 가전 시장이 성숙 국면에 접어든 데다, 중국 업체들의 가격 경쟁력이 강화되면서 외형 성장은 제한적일 것이란 분석이다. 증권가에서는 가전 사업이 과거처럼 실적을 견인하기보다는 프리미엄 제품과 구독 모델을 통해 수익성을 방어하는 역할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과 로봇청소기 등 고부가 제품군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고, 가전 구독과 유지보수 서비스는 반복 수익을 창출하며 실적 변동성을 완충하고 있다는 평가다. 다만 TV·IT 등 디스플레이 기반 사업은 수요 회복 지연과 마케팅 비용 부담으로 단기간 내 의미 있는 반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많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글로벌 가전 시장이 올해에도 2%대 중반 성장률에 머물며 둔화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 하이얼·미디어 등의 가격 공세로 볼륨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LG전자는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과 로봇청소기 중심으로 평균판매가격(ASP)을 끌어올리고, 구독 서비스 확대로 마진 방어에 나설 것이란 분석이다. TV 시장 역시 역성장이 예상되지만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중심의 프리미엄 전략으로 수익성 방어에 초점을 맞출 것이란 평가다. 또 다른 시장조사업체 옴디아 역시 생활가전 매출은 정체 국면에 머무는 반면, 구독과 플랫폼 기반 반복 수익이 완충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 전장·HVAC, 성장 축으로 부상
반면 전장(VS)과 HVAC 사업은 LG전자의 실적 회복을 이끄는 핵심 축으로 꼽힌다. 전기차(EV) 확산과 함께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고급화,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인공지능 중심 차량(AIDV)으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전장 부품 수요가 구조적으로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LG전자는 높은 전장 수주잔고를 바탕으로 매출이 본격적으로 실적에 반영되는 구간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HVAC 사업 역시 가정용 중심에서 상업·산업용 공조로 포트폴리오를 확대한 가운데, AI 데이터센터 확산에 따른 냉각 수요 증가가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데이터센터 냉각 시장이 중장기적으로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으며, 칠러와 시스템 에어컨을 보유한 업체들이 구조적인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다.
로봇 사업도 LG전자의 중장기 성장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 증권가에서 잇따르고 있다. 대신증권 박강호 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LG전자가 LG이노텍·LG디스플레이·LG에너지솔루션 등 계열사와의 시너지를 통해 휴머노이드와 AI 로봇 솔루션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며, 2026년을 로봇을 포함한 신사업의 실적 턴어라운드 원년으로 평가했다.
시장조사업체 IDC는 전기차와 SDV 시장이 2026년까지 연평균 18% 성장하고,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모듈 수요는 20% 이상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전장 부품 수요가 단순 양적 확대를 넘어 고부가 소프트웨어와 통합 솔루션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수주잔고를 확보한 업체들의 수익성 개선 여지가 커졌다는 분석이다. HVAC 분야에서는 데이터센터 냉각 시장이 연평균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가며, 산업용 공조 비중이 빠르게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증권가 관계자는 "LG전자의 실적 회복 여부는 가전 사업의 반등보다는 전장과 HVAC 등 B2B 사업이 어느 수준까지 수익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며 "올해는 체질 전환의 성과가 숫자로 검증되는 첫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