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계에 머물던 인공지능(AI)이 로봇·기기에 탑재되면서 물리 공간을 인지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초 열린 CES 2025에서 이런 개념의 '피지컬 AI'를 화두로 던진 바 있다.
피지컬 AI는 내년 1월 6일(현지시각)부터 9일까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6의 핵심 주제다. CES를 주최하는 미국 소비자기술협회(CTA)는 내년 행사의 핵심 트렌드 중 하나로 '로보틱스'를 꼽았다. 황 CEO 발표 후 불과 1년 만에 개념적으로 다뤄지던 피지컬 AI가 '상용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방증이다. AI 개발의 무게 중심도 대화형(챗봇) 서비스에서 로보틱스 분야로 넘어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이런 흐름에 맞춰 '로봇 기술 생태계'를 앞세워 세계 시장에서 성과를 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휴머노이드 맥스(M.AX·제조 분야 AI 전환) 얼라이언스는 CES 2026에 공동관을 구성하고 로봇 부품·플랫폼·AI 등을 아우르는 산업 생태계를 소개한다. 이 단체는 산업통상부 주도로 지난 9월 출범해 현재 약 1300개 기업·기관이 참여 중인 '맥스 얼라이언스'의 한 분과다. LG전자·두산로보틱스·서울대·카이스트·한국로봇융합연구원·한국전자통신연구원·한국로봇산업협회 등 휴머노이드 로봇 관련 약 250개 산·학·연 단체가 속해 있다. 정부는 이 연합체를 통해 2029년 연간 1000대 이상의 휴머노이드를 양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휴머노이드 맥스 얼라이언스가 CES 2026에서 조성하는 공동 전시관에서는 10개 기업이 20개 부스를 운영한다. CES 2026에는 우리나라 기업 약 900곳이 참가할 예정인데, 휴머노이드를 주제로 한 한국 전시 부스는 이곳이 유일하다. 로봇 플랫폼 기업인 에이로봇·로브로스·로보티즈 등과 휴머노이드 AI 개발사인 투모로 로보틱스 등이 여기서 자사 기술·제품을 소개할 계획이다. 에스비비테크·에이딘로보틱스·테솔로·페러데이다이내믹스와 같은 '로봇 부품사'도 이 부스에 참여한다는 게 차별화 지점으로 꼽힌다. 미국·중국 등에서는 로봇 '완성품' 위주의 전시가 이뤄지는데, 한국 부스에서는 부품·플랫폼·AI를 아우르는 생태계의 유기적 연결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류재완 에스비비테크 대표(K-휴머노이드연합 총괄위원)는 "피지컬 AI 시대에는 단일 로봇의 성능보다, 이를 지탱하는 구동계·제어·AI가 실제 산업 환경에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결합돼 있는지가 경쟁력을 좌우한다"며 "CES 2026은 한국형 로봇 생태계가 세계 시장에서 하나의 완성된 경쟁 모델로 평가받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에이로봇은 이번 전시에서 자사 로봇 '앨리스4'와 '앨리스M1'이 공정을 분담해 동작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는 기술을 시연한다. 로보티즈는 로봇 '그리퍼'가 임의로 배치된 공병을 인식하고 분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 고정형 로봇이 붓을 들고 항아리에 글씨를 쓰는 시연도 진행된다. 투모로 로보틱스는 휴머노이드 로봇 'RB-V1'을 전시한다. 이 로봇은 산업용 컨베이어 환경에서 대상물을 인식해 지정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에스비비테크는 이런 로봇을 구동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부품을 전시할 계획이다. ▲모터의 회전수를 조절해 로봇 관절의 정밀도를 높일 수 있는 '하모닉 감속기' ▲전기 신호를 받으면 동작해 로봇의 근육과 같은 역할을 하는 '소형 액추에이터' ▲로봇의 이동 궤적과 미세 동작을 조절하는 '조향·현심 구동기' 등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소개할 계획이다.
LG전자·현대차그룹·두산로보틱스·HL그룹 등 대기업들도 저마다 전시 부스를 꾸리고 '피지컬 AI' 역량을 소개할 계획이다. LG전자는 가사 노동을 줄여주는 홈 로봇 'LG 클로이드'를 CES 2026을 통해 공개한다. 이 로봇은 다섯 손가락을 정교하게 움직여 집안 여러 물건을 집어 올릴 수 있다. 사람과 주먹 인사를 나누는 식의 교감도 가능하다. LG전자 관계자는 "몸체에 양팔을 달고 다섯 손가락을 구성한 건 인체에 맞춰진 거주 환경에서 원활히 가사 노동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형태이기 때문"이라며 "AI 기반으로 주변 환경을 스스로 인식·학습하는 능력은 물론 거주자의 스케줄·라이프스타일 등에 맞춰 다양한 가전을 제어해 고객을 케어하는 비서 역할도 보여 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의 로봇 개발 기업 보스턴다이내믹스는 CES 2026에서 360도 회전 관절을 장착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비롯해 4족 보행 로봇 '스팟'과 이동 플랫폼 '모베드' 등을 시연한다. 두산로보틱스는 항공기·건물 등 크고 복잡한 구조물의 표면을 분석해 다듬거나 갈아낼 수 있는 로봇 '스캔앤고'를, HL그룹은 로봇 관절 구동 장치와 물류 로봇 '캐리' 등 그룹 내 로봇 생태계 기술을 전반적으로 소개한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피지컬 AI 시장 규모는 2020년 50억달러(약 7조1600억원)에서 올해 225억달러(약 32조2200억원)로 성장했다. 2030년에는 643억달러(약 92조840억원) 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모건스탠리도 세계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이 2050년에는 약 5조달러(약 7160조원) 규모로 성장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CTA는 매년 CES 개최 전 출품작을 심사해 기술력이 뛰어난 제품에 '혁신상'을 수여하고 있다. CES 2026 혁신상 로보틱스 분야 출품작 수는 올해 대비 32% 증가했다. 이는 AI 분야 출품작 수 증가율(29%)보다 높은 수치다. 로보틱스 분야에서 혁신상을 받은 15개사 중 8곳이 한국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