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가전 시장이 정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코로나19 특수는 온데간데 없고 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 주요 품목의 성장세가 둔화했습니다. 가전 1위 기업인 LG전자 역시 스펙(사양) 경쟁이나 품질 홍보만으로는 소비자의 구매를 자극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에 LG전자가 꺼낸 해법은 '예능 콘텐츠'였습니다.
LG전자는 지난해 8월 미국에서 온라인동영상(OTT) 플랫폼 아마존 프라임과 손잡고 자체 리얼리티 프로그램 '하우스 오브 서바이벌'을 제작했습니다. 참가자를 가전 없이 생활하는 집에 투입해 불편함을 극대화하고, 미션을 성공하면 LG 가전을 하나씩 지급하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습니다. 가전이 없을 때 발생하는 문제와 제품 도입 후 즉시 개선되는 장면을 대비해 "가전이 왜 필요한가"라는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프로그램은 공개 직후 미국 LG채널 리얼리티 장르에서 시청 시간 1위를 기록하며 흥행했습니다.
이 콘텐츠는 LG전자가 직면한 과제를 정면으로 다뤘습니다. 이미 가전을 보유한 소비자에게 "왜 다시 바꿔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 상황에서, 광고로 설명하기 어려운 생활 속 불편·시간 절약·스트레스 감소 등을 경험하도록 설계했습니다. 기능 설명보다 체감되는 필요성을 앞세워 북미 시장의 교체 수요를 다시 환기하려는 전략이 담겼습니다.
국내에서는 조만간 공개될 넷플릭스 요리 예능 '흑백요리사 시즌2'를 전면 후원했습니다. 셰프들이 LG 오븐·쿡탑·냉장고를 실제 조리 과정에 활용하며, 조리 중 발생하는 문제를 제품 기능으로 해결하는 장면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LG전자는 시즌1에서는 제작지원(PPL) 방식으로 참여했지만, 시즌2에서는 공식 협찬사로 후원 범위를 확대했습니다. 프리미엄 라인업인 LG 시그니처와 오브제컬렉션 제품 수십대가 무대 곳곳에 배치되면서 실사용 홍보 효과가 예상됩니다.
LG전자는 가전 사업의 성장 정체에 TV 사업 구조 개편과 광고 플랫폼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로 TV 판매만으로는 수익 확보가 어려워지자, 웹OS 기반 FAST(광고 기반 무료 방송) 서비스 'LG채널'을 글로벌 성장축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올해 3월 기준 LG채널의 전 세계 시청 시간은 전년 대비 40% 이상 증가했고, 채널 수도 4000개로 확대됐습니다. 서비스 국가는 36개국으로 늘었으며 NBC유니버설·BBC스튜디오·소니 등 글로벌 콘텐츠 기업과의 협력도 강화했습니다.
TV 사업을 담당하는 MS사업본부는 올해 2분기에만 1917억원의 영업손실을 냈습니다. 매출(4조2934억원)도 전년 동기 대비 13.5% 빠졌습니다. 반면 웹OS 플랫폼 매출은 지난해 1조원을 넘기며 새로운 캐시카우로 부상했습니다. LG전자는 TV뿐 아니라 노트북·모니터·상업용 디스플레이 등 디스플레이 기반 사업을 통합해 광고·콘텐츠 수익을 확대한다는 계획을 내놨습니다. '하우스 오브 서바이벌' 같은 자체 콘텐츠 제작도 이러한 플랫폼 전략과 맞물린 움직임입니다.
업계에서는 LG전자가 단순히 가전을 판매하는 제조사를 넘어 콘텐츠와 광고 플랫폼을 결합한 새로운 사업 모델로 전환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가전 정체기 속에서 "가전이 왜 필요한가"를 콘텐츠로 설명하고, TV 판매 대신 광고 플랫폼을 키우는 전략은 사업 구조 재편 의지를 보여줍니다.
콘텐츠 확산력과 구매 전환 효과는 앞으로 검증될 과제지만, 한가지 흐름은 분명해 보입니다. LG전자가 더 이상 제품 기능을 나열하는 기업이 아니라, 가전이 바꾸는 경험을 연출하는 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정체된 글로벌 가전 시장의 판도를 흔들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