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대기업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 기술 자립을 위해 투자를 확대하면서 관련 기업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기술력이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여전히 뒤처져 있는데, 중국의 추격 속도까지 빨라지면서 국내 공급망의 취약성이 부각된 탓이다. 정부는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을 전년 대비 약 19% 늘린 35조3000억원으로 확대했고, 삼성전자와 LG도 각각 450조원, 100조원 규모의 국내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기술·제조 기반 강화에 나섰다.
24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제2차 소부장 경쟁력 강화 기본계획'과 '소부장 특화단지 종합계획'을 확정했다. 정부는 고부가 제품·탄소중립·핵심광물 등 4대 도전 기술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당 200억원 이상을 투입해 '15대 슈퍼 을(乙)'을 육성하겠다는 방침이다. 산업부 조사에 따르면 국내 첨단 소재 기술 수준은 83.3점으로 미국(100)·일본(96.1)과 격차가 크고, 중국(80.5)과의 기술 간극도 빠르게 좁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이 점수를 오는 2030년 92점까지 끌어올리고, 포브스 글로벌 2000대 기업 중 국내 소부장 기업을 현재 16곳에서 25곳으로 확대하는 목표도 제시했다. 인공지능(AI)·반도체를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상황에서 핵심 기술을 자국 내에서 확보하는 것이 기업 경쟁력뿐 아니라 국가 안보와도 직결된다는 판단이다.
삼성과 LG 역시 대규모 투자 계획의 중심축을 국내 R&D·생산시설 확대로 두고 있다. 삼성전자는 시스템반도체·HPC·차세대 패키징·파운드리 생태계 육성 등 국가 전략기술을 포함해 450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제시한 바 있으며, LG 역시 전장·배터리·화학·디스플레이 등 핵심 사업 중심으로 100조원 규모의 투자를 공언했다. '기술 자립' 기조가 정부·대기업 양측의 중장기 전략축이 된 것이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국산화 성과를 낸 소부장 기업들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에스비비테크는 볼펜용 볼·세라믹 베어링 등 기초 부품의 국산화를 추진하고 일본이 독점하던 하모닉 감속기를 국내 최초로 양산했다. 반도체 장비업체 세메스는 일본 기업 비중이 절대적인 포토 공정용 트랙 장비를 국산화하며 대체 가능성을 확인했다. 케이엔알시스템은 수입 의존도가 높던 소형 서보밸브를 개발해 로봇·방산·항공우주 분야에 공급하고 있고, 에이딘로보틱스는 외산 대비 낮은 가격의 힘·토크 센서를 기반으로 휴머노이드용 신규 제품까지 확장하고 있다.
선익시스템도 일본 캐논토키가 80% 이상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디스플레이 증착기' 분야에서 선전하고 있는 국내 기업으로 꼽힌다. 최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증착기 시장의 독점 구조를 깨고,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 BOE와 8.6세대 제품 공급 계약을 맺기도 했다.
다만 산업계에서는 정부와 민간의 투자 확대가 실제 산업 생태계 강화로 이어질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대형 R&D 계획이 반복적으로 발표되지만 원천기술 격차와 구조적 한계는 그대로라는 지적이다. 장비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과를 내는 것과 달리 매출 1조원 이상의 국내 반도체 장비 기업이 드물고, 소재·부품 분야도 대기업 계열을 제외하면 성장 사례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류재완 에스비비테크 대표는 "최근 정부와 대기업의 관심이 커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국내 기술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단기적 사업 지원보다 장기적 연구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