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고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 별세 이후 기존 DX(완제품)·DS(반도체) 2인 대표이사 체제가 무너졌던 삼성전자가 모바일 전문가인 노태문 사장을 DX부문장 겸 대표이사로 21일 선임하며 '투톱' 체제를 복원했다. 여기에 각 분야 최고 전문가를 삼성종합기술원(SAIT) 원장과 DX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에 등용하며 '기술통' 전문 경영인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 전영현 부회장, 아직 대체 불가… "내년까지 반도체 책임진다"
앞서 삼성전자의 2인자로 불렸던 정현호 사업지원TF 부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가운데 같은 1960년생인 전영현 부회장은 사실상 내년까지 반도체 사업 부활을 위해 자리를 지키게 됐다. 전 부회장은 DS부문장에 메모리사업부장을 겸임하며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해 차세대 D램 등 삼성전자의 중추인 메모리 사업 부활이라는 미션을 계속 수행할 예정이다. 일각에선 메모리사업부장에 다른 인물이 하마평에 올랐으나, 삼성 경영진은 아직 전 부회장의 역할이 크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 내부에서는 아직 전 부회장을 대신할 인물이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과거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과 함께 삼성 반도체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전 부회장은 DS부문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는 위기 상황에 구원 투수로 지난해 돌아왔다. 다만 전 부회장은 DS부문장과 메모리사업부장을 병행하는 동시에 대표이사, SAIT 원장까지 맡고 있어 직책이 너무 과도하다는 우려를 반영해 SAIT 원장직은 이번 인사로 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대체 불가 경영인이라는 것이 삼성 안팎의 평가다.
앞서 업계에서는 전 부회장의 나이를 고려해 DS부문장직을 제외한 사업부장 직무를 다른 반도체 경영진에 일임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메모리사업부장도 유지하게 됐다. 이는 전 부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됐다는 설명이다. 삼성 고위관계자는 "SK하이닉스에 시장을 내준 HBM 사업에서 삼성의 입지를 강화하고, 전 부회장의 전문 영역인 차세대 D램 개발 역시 끝맺음을 하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 노태문 사장, 삼성 최초의 모바일 출신 DX부문장
노태문 사장의 대표이사 선임에 대해 크게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 전통적으로 가전 전문가가 역임해왔던 DX부문장을 모바일 전문가인 노 사장에 맡기면서 가전, TV 등 모든 세트 부문에 MX사업부의 성공 DNA를 이식하겠다는 경영진의 의도가 엿보인다. 실제 지난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IFA 2025'에서 노 사장은 "모든 가전 제품을 AI와 연결성을 중심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수익성 개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전, TV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조직개편을 시사하기도 한다. 앞서 실시됐던 TV를 담당하는 영상디스플레이(VD)사업부를 비롯해 DX부문에 대한 경영진단과 감사 결과가 실제 인사에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노 사장의 대표이사 선임 이전부터 MX사업부의 전문 인력이 가전, TV 등으로 전환 배치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윤부근 사장을 비롯해 한종희 부회장 등으로 이어지는 DX부문장의 계보는 TV나 가전 분야 전문가가 완제품 사업을 가장 잘 이해한다는 전통에 기반한다"며 "노태문 사장을 완제품을 총괄하는 지위에 올린 것은 기존 방식대로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깔려있다"고 설명했다.
◇ '기술통' 윤장현·박홍근 사장 신규 선임… 신기술 발굴에 권한 위임
윤장현 삼성전자 DX부문 CTO(사장)과 박홍근 SAIT(옛 삼성종합기술원) 원장(사장)을 새로 선임한 것도 이번 사장단 인사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핵심은 '기술 인재의 전면 배치'다. 삼성전자가 경영 안정성과 조직 재정비에 그치지 않고, AI·반도체 중심의 미래 사업 구조 전환을 본격화하려는 의지를 인사에 반영했다는 평가다. 완제품(DX)과 미래기술 연구(SAIT) 양 축에 '기술 경영'을 강화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신임 DX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 겸 삼성리서치장으로 선임된 윤장현 사장은 삼성전자의 소프트웨어·플랫폼 전략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기술통이다. 그는 MX사업부에서 IoT·타이젠, 소프트웨어 플랫폼, SW 담당 등을 두루 거쳤고 지난해 말 삼성벤처투자 대표이사로 옮겨 AI·로봇·바이오·반도체 분야 유망 기술 투자를 주도했다. 삼성전자는 윤 사장이 가진 '기술을 보는 눈'과 투자 경험이 DX부문의 AI 전환과 세트 사업의 경쟁력 강화에 직접적인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SAIT 원장으로 신규 영입된 박홍근 사장은 하버드대에서 25년간 교수로 재직한 글로벌 석학이다. 화학·물리·전자 등 기초과학 전반을 연구하며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 연구를 이끌어온 인물로, 삼성은 박 사장에게 양자컴퓨팅·뉴로모픽 반도체 등 차세대 디바이스 연구를 총괄시키며 미래 기술 설계의 핵심 축을 맡겼다. 이번 인사는 반도체 신기술 개발과 'AI 주도 컴퍼니' 전환 속도를 높이겠다는 삼성의 전략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