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가전업체들이 소형 가전을 교두보로 삼아 한국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로봇청소기·미니 세탁기·공기청정기 등으로 국내 소비자들의 신뢰를 확보한 뒤, 냉장고·세탁기·TV 등 대형 가전으로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부터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기술력을 끌어올린 중국 기업들이 한국 내 유통과 사후서비스(A/S)망까지 갖추며 전방위 공세에 나선 모습이다.

12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4년 중국산 가정용 전자제품 수입액은 49억7250만달러로 10년 전(26억9213만달러)보다 약 두 배 수준으로 늘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 수출한 가전제품(79억7469만달러)의 62%에 달하는 수준이다. 과거 중국이 한국 기업의 매출처였다면, 이제는 중국 기업이 가성비와 기술력을 앞세워 국내 시장을 공략하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5축 로봇 팔이 달린 로보락 로봇청소기 '사로스 Z70'./최지희 기자

◇ 中 가전 수입액 10년 새 두 배… 역전된 시장 구도

중국산 소형 가전의 약진은 수치로도 뚜렷하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로보락은 올해 한국 로봇청소기 시장 점유율 50%를 돌파하며 1위를 차지했다. 2위 삼성전자는 점유율이 20%대 초반에 그쳤다. 로보락의 한국 매출은 2020년 291억원에서 2024년 2414억원으로 급증했다.

국내 로봇청소기 시장 상황을 살펴보면 중국 브랜드의 점유율이 약 70%에 달한다. 로보락에 이어 드리미도 점유율이 작년 4.1%에서 올 상반기 12.8%로 성장했다. 지난해 한국의 소형가전·전열기기 수입품 중 중국산 비중은 60%를 넘었고, 중국산 청소기 수입액만 7000억원(4억7800만달러)에 달했다.

이처럼 미니 가전 시장을 장악한 중국 브랜드들은 이를 발판으로 대형가전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로보락은 세탁 10㎏·건조 6㎏ 일체형 제품을 출시하며 세탁가전 시장에 뛰어들었다. 고가 로봇청소기 시장에서 80% 안팎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가성비' 이미지를 벗고 프리미엄 입지 구축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마이디어는 대용량 세탁건조기와 식기세척기 등을 판매하며 품목 확대에 나섰다.

샤오미는 지난달 서울역 인근에 A/S 전담센터(ESC)를 세워 국내 서비스 인프라를 완비했다. 최근 세탁기·냉장고·에어컨의 글로벌 출시를 공식화하며 대형가전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시장에서는 샤오미의 스마트홈 브랜드 '미지아'가 국내 유통망을 통해 본격 유입될 가능성도 예상하고 있다. 하이얼은 이미 냉장고·세탁기 등의 제품을 쿠팡 등에서 병행 판매하며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샤오미(Xiaomi) 익스클루시브 서비스 센터./샤오미코리아 제공

TV 시장에서도 중국 브랜드의 추격세가 뚜렷하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2025년 1분기 글로벌 프리미엄 TV 시장(출하량 기준)에서 하이센스(20%)와 TCL(19%)이 각각 2·3위를 차지했다. 삼성전자(28%)를 추격하며 LG전자(16%)를 제쳤다. 불과 1년 전 62%에 달하던 삼성·LG의 합산 점유율은 44%로 떨어졌다.

TCL은 2023년 한국 법인을 설립하고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직영 운영하며 65인치 QLED TV를 80만원 이하로 판매하는 등 공격적인 가격 전략을 폈다. 하이센스도 100인치 QLED TV를 출시하며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대비 절반가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 공격적 M&A로 기술력 향상… 대형가전 점유율 확대 경계

중국 가전업체의 기술력 향상은 201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M&A 전략에서 비롯됐다. 하이얼은 GE 가전사업부와 이탈리아 빌트인 브랜드 캔디를, 하이센스는 도시바 TV 사업부와 유럽 가전업체 고렌예, 자동차용 에어컨업체 샌든 홀딩스를 인수했다. 기술을 흡수하고 인공지능(AI)을 접목하며 글로벌 기업과의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혔다. 최근에는 쿠팡·네이버 등 국내 이커머스 입점과 자체 A/S 인프라 구축으로 판매 채널까지 확보했다.

업계는 1인 가구 증가와 미니멀 라이프 확산이 중국산 소형가전의 확장세를 뒷받침했다고 보고 있다. 프리미엄 대형 가전에 집중한 국내 대기업의 전략과 맞물리며 중국 브랜드가 침투할 여건이 형성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OLED·인공지능(AI) 플랫폼을 앞세운 프리미엄 라인업 강화로 방어에 나서고 있지만, 미니 가전 대응은 상대적으로 더디다는 지적이 많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중국 제품의 품질과 디자인이 빠르게 개선되면서 저가 이미지를 탈피하고 있다"며 "중국 브랜드들이 IoT(사물인터넷) 주방·생활가전, 식기세척기·의류건조기 등 품목군을 매년 확대하며 국내 법인 신설과 유통·마케팅 채널 확장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소형 가전에서 확보한 점유율이 대형 가전으로 번질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