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타이난에 있는 TSMC 18공장 앞./로이터연합뉴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가 내년부터 생산하는 칩에 대해 가격 인상을 추진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수요 폭증의 원년이 된 올해의 경우 예년보다 빠르게 가격 협상에 돌입한 가운데, 업계에서는 AI 칩용 첨단 공정을 중심으로 가격이 최대 10%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AI 반도체 공급 부족이 심화하고 있는 만큼 빅테크 고객사 대부분은 TSMC의 가격 인상 정책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3일 업계와 대만 현지 언론에 따르면 TSMC는 고객사인 팹리스(반도체 설계) 업체들에 내년 첨단 공정 가격 인상 계획을 순차적으로 통보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TSMC가 2~5㎚(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첨단 공정을 대상으로 3~10% 수준의 가격 인상을 타진 중이라고 전했다.

이번 가격 정책은 칩의 최종 응용처에 따라 다년간 가격을 차등 적용하는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업계는 주목하고 있다. IT매체 디지타임스는 TSMC가 향후 4년간 AI, 고성능컴퓨팅(HPC) 칩에 10%에 가까운 인상률을 적용하고, 중앙처리장치(CPU) 칩은 약 7%, 모바일 기기 칩은 5%가량 인상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팹리스 업계 관계자는 "같은 5㎚ 공정을 사용하더라도 고성능컴퓨팅 칩을 중심으로 가격 상승 폭이 그 어느 때보다 가팔라지고 있다"며 "AI가 기존 산업 주기를 무너뜨리고 있어 TSMC도 구조적 변화에 따라 가격 정책을 대폭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례 없는 첨단 공정의 수요는 이 같은 차등 가격 정책의 명분이 되고 있다. TSMC는 지난 3분기(7~9월) 역대 최대 실적을 경신했는데, 핵심 동력은 단연 첨단 공정이었다. 5㎚와 3㎚ 계열 공정 매출이 지난 2분기에 이어 3분기에도 전체의 60%를 넘어섰다. 응용처별 매출도 AI 칩이 포함된 HPC 비중이 57%에 달했다. 당초 증권가에선 2028년에야 TSMC 전체 매출에서 AI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35%에 이를 것으로 봤으나, 현재 추세라면 올해나 내년에 이 수치가 조기 달성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칩 생산 비용이 과거보다 빠르게 늘고 있는 점도 가격 인상의 주된 요인이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 일본 구마모토, 유럽 등 해외 생산 거점 다변화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 특히 총 1650억달러(약 235조원)가 투입되는 미국 애리조나 공장 건설 및 운영 비용은 대만 현지 대비 20~30%가량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TSMC는 해외 팹 생산 초기에 연간 총 마진이 2~3% 감소하고, 향후 3~4%까지 낮아질 수 있다고 밝혀왔다. 해외 공장으로 인해 총이익률이 하락할 수 있다고 공언해 온 만큼, 첨단 공정 가격 인상을 통해 수익성을 방어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고객사들이 TSMC의 가격 인상에 쉽게 반기를 들지 못하는 건 독점적인 시장 지위 덕분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TSMC는 올 2분기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70.2%를 기록, 2위 삼성전자(7.3%)를 압도했다. 여기에 엔비디아의 최신 GPU '블랙웰', 애플의 M시리즈 등 AI 칩 대부분이 TSMC의 첨단 공정을 거치고 있어 빅테크 고객사들의 TSMC 의존도는 절대적이다.

일각에선 대만 최대 팹리스 업체인 미디어텍과 미국 퀄컴 등 몇몇 고객사들이 TSMC의 가격 인상이 과하다고 여겨 삼성전자 등 대체 공급처를 모색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당장 파운드리 협력사를 전환하는 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미디어텍은 최근 사업설명회(IR)에서 비용 상승에 대응해 칩 가격을 인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TSMC는 이번 가격 정책과 맞물려 선택과 집중 전략을 강화할 조짐이다. 팹리스 업계는 TSMC가 AI·HPC 등 수익성이 높은 첨단 공정에 생산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일부 6나노 공정 설비를 5나노 생산 라인으로 전환하는 등 구형(성숙) 공정의 생산 능력을 점진적으로 축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성숙 공정의 캐파 감소는 내년까지 공급 부족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팹리스 업계 관계자는 "TSMC의 첨단 공정 집중 현상은 결국 성숙 공정 시장에도 연쇄적인 가격 인상 압박을 더해, 팹리스 업체들의 원가 부담을 이중으로 가중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